애도와 음식

cns21st
cns21st · 신학으로 세상 보려는 목사
2024/02/02
<방어가 제철> 중 [달밤] 문장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서 집 안을 가득 채운 갓 지은 밥 냄새를 맡았던 늦은 저녁, 사람 사는 집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동안 내가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는 자각에 코끝이 뻐근해졌어요.(10쪽)
가파른 내리막길로 점점 사라지는 소애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봤던 기억이 나요. 그 밤에 떴던 달 모양도요. 방구석 어딘가에 점자코 떨어져 있을 것 같은, 잘린 손톱 모양의 가는 그믐달이었어요. (11쪽).
물건은 쌓여 있는데 내 가난은 외려 더 불어나 있는 기분이랄까요.(12쪽)
버는 건 변기 같고 쓰는 건 숨 쉬는 것 같다고요.(13쪽)
그러고 보니 우리 일관되게 가난하네.(14쪽)
재료를 씻고 썰고, 볶거나 삶는 일이 인생 마지막 과제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서 요리를 해요. 만든 음식은 수행하듯 정성을 다해서 먹어요. (16쪽)
불 앞에 서서 국자로 거품을 꼼꼼하게 걷어내며 육수가 우러나는 걸 지켜봤는데 어느 새 한 시간이 후딱 지나 있더라고요. 퇴사하고 나서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요. 수세미로 부엌 후드를 청소했더니 한 시간, 물에 락스를 풀어 욕실을 청소했더니 두 시간, 옷 장에서 안 입는 옷을 골라냈더니 세 시간, 그런 식으로 시간이 뭉텅뭉텅 잘려 나가요. 이따금 엄마가 전화해서 물어요. 뭐 하고 있냐고. 그럼 매번 같은 대답을 해요. 있어. 그냥 있어. (17쪽)
시도 잠도 미래도 오지 않을 거라고, 다만 늙어갈 거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시를 생각하지 않아도 쓰지 않아도, 읽는 것조차 하지 않아도 하루가 가요. 실은 너무나 잘 가요. 기어코 가고 만다는 건,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불안한 안심 같은 거더라고요. 불행한 행복 같은 거요. 언니, 내가 다시 쓸 수 있을까요. P내 시와 화해할 수 있을까요. (18쪽)
딸기 하니까 생각나요. (23쪽)
내가 돈이라도 많으면 급한 데 쓰라고 얼마쯤 쥐여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있어야죠. 대신 만날 때마다 연금복권을 세 장씩 사줬어요. 무력하더라고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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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눈으로 인간,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싶은, 젊지 않으나 젊게 살고자 하는 젊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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