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웅변하는 중독

퇴치1
퇴치1 · 주로 애니메이션
2023/01/21
영화 <어딕션> 리뷰
스틸컷 출처: 다음 영화

철학 박사 과정에 있는 ‘캐슬린’은 밤길에 만난 뱀파이어에게 목덜미를 물린다. 목에선 피가 멈추지 않고, 수업도 빠진 채 오한에 떨기를 며칠. 캐슬린은 뱀파이어가 된다. 안색은 창백해지고, 햇빛을 보지 못하기에 낮에는 선글라스를 끼는 등 일상의 많은 것이 변한다. 무엇보다도, 더는 사람의 식사를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캐슬린은 사람의 피를 탐하기 시작한다.

아벨 페라라 감독의 1995년 작 <어딕션> 속 뱀파이어들은 흡혈 직전 동일한 주문을 한다(“내게 꺼지라고 해봐, 애원하지 말고”).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유행했던 빨간 마스크 괴담의 고약한 질문을 연상시키는 이 말에 피해자들은 백이면 백 같은 대답, 아니 애원한다. 그러면 곧 뱀파이어에게 목덜미를 유린당한다. 같은 말에 같은 애원으로 응수한 캐슬린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캐슬린 역시 뱀파이어가 된 후에는 자신의 사냥감 면전에 위의 두 가지 선택지를 들이민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이런 질문이 절로 떠오른다. “그래서 꺼지라고 했다면 과연 순순히 물러나기나 했을까?”


기울어진 무게추

영화 속 인물들의 사고와 지각은 예정론(결정론)에 기반해 있다. 신학적으로 칼뱅과 웨슬리로 분화되는 예정론은 상충하는 지점에 있음에도 한 가지 전제를 공유한다. 아담으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하게 된 인간 일반의 자연적 의지(natural free-will)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 캐슬린은 뱀파이어가 된 후, 잠시 간의 고통을 겪으며 주사기로 길바닥에 자빠진 행인의 피나 뽑아 가던 것이 전부였다. 그런 그녀가 얼마간의 착오를 겪은 뒤, 밤거리를 배회하며 과감히 흡혈을 즐길 수 있던 것은 자신 앞에 놓인 가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애초에 오염되어 있다는.
스틸컷 출처: 여성 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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