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살구꽃 · 장면의 말들에 귀를 모아봅니다.
2023/09/18
20대초의 어느 날,  영등포역 근처 레스토랑에서 L을 만나기로 했다.
겨울 저녁이었다.
이 날은 왠지 한껏 멋을 내고 싶었다.  나는 하얀누비외투에 검은모직치마를 입고 부츠를 신었다.

L은 오늘 나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긴히 할 말, 그게 뭐에요?
알 듯 모를 듯 했지만, 따스한 불빛 아래서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약속장소를 걸어가는 내 발짝엔
듬뿍 듬뿍 설렘이 뒤따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쳐다만 봐도 아까울 만큼 너무나 멋진 L.

그를 처음 만난 건 여름, 치악산에서였다. 친구와 둘이 떠난 여행에서 남여섞인 대여섯명의 한팀으로
오게 된 L. 그 팀에서 누군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 둘이 온 거에요? 다른 일행은 없어요?
- 네.
- 아우, 어떻게 여자 둘만 겁도 없이 와요? 어디서 텐트 칠 건데요?
- 그냥 봐서 좀 괜찮다 싶은 데서요.
- 그러지 말고 우리 옆에다 쳐요.

그들은 자기네 텐트를 두 개 치면서 우리 것도 도와주었다.  저녁을 같이 지어먹고 서로 인사를 했다.
내 친구는 간호대학생이었고 나는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쪽은 모두 학생이라고 했는데 나이도 얼추 있어보이고 자꾸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L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돌아가는 날, 다시 청량리역에서 헤어지며 나는 L과 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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