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우드스톡 페스티벌? 전혀 반갑지 않다.
2023/01/14
나는 10년 차 페스티벌 고어(festival goer)다. 말 그대로 뮤직 페스티벌에 가는 사람이다. 주식의 등락보다 페스티벌 라인업에 관심을 기울인다. 다양한 뮤지션의 라이브에 맞춰, 생맥주를 마시며 춤을 춘다. 록 페스티벌에 입장한 순간, '록이 죽었다’라는 세간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페스티벌 팔찌를 손목에 찰 때부터 느끼는 두근거림은 메타버스로 대체할 수 없다고 믿는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뮤직 페스티벌을 즐겼을까? 페스티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9년 8월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도달한다. 10만 명의 히피가 샌프란시스코에 모인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 그리고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로부터 2년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로 울적한 시대였지만, 음악으로 시대를 치유할 수 있다는 청년들의 낙관도 존재했다.
뉴욕 주 북부 베델 평원에 제퍼슨 에어플레인, 지미 헨드릭스, 산타나, 조안 바에즈, 더 그레이트풀 데드, 재니스 조플린 등 당대의 전설적인 뮤지션, 그리고 수십만의 히피가 집결했다. 프리 섹스와 약물 복용, 그리고 노래와 춤이 일상이었다. '3일간의 평화와 음악'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우드스톡은 자유와 히피, 평화, 반문화 등 그 모든 것의 표상이 되었다. 한국에 소재한 우드스톡이라는 이름의 여러 바(Bar)를 생각해보시라. 우드스톡이 세계인의 노스탤지어로 기록되었다는 증거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9년, ‘우드스톡’이라는 이름이 부활했다. ‘우드스톡의 창시자’인 마이클 랭이 베테랑 기획자 존 셰어와 손을 잡았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폐쇄된 공군비행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