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가 사라져가는 사회>
2024/01/09
작년 연말, 영화 <괴물>을 봤다.
학교를 둘러싼 폭력, 교사에 대한 폭력, 정상성에 대한 폭력 그리고 정상성으로부터 벗어난 주체, 정념에 대한 단단한 폭력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괴물로 인식하고, 또 괴물로 만드는 3명의 라쇼몽적인 시선을 통해 살펴본 흥미로운 서사구조를 지닌 작품이었다. 무연히 요즘 <고려거란전쟁>이란 사극이 인기라고 들어서 같이 보았는데, 모양새는 전통 사극인데 예전의 그 사극이 아니었다. 천추태후가 2회 만에 퇴장하고 현종역시 2화만에 왕위에 오르는 등 숨이 차서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쉽게 이야기해서 서사를 대부분 줄여서 유튜브 영화 요약처럼 매회를 전개한다.
왜 이렇게 서사가 축소되는 양식이 한국 드라마에서 유행할까. 한국도 웹툰이 원작인 드라마가 많이 제작된다. 지금까지 본 것만 해도 이태원클라스, 마스크걸, 지옥 등 수 없이 많다. 아, 작년 말에 재밋게 봤던 ‘무빙’도 강풀 원작이었다. 내 또래 유년기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허영만의 <오, 한강> 등과 전혀 다른 미디어 환경 속에서 웹툰 매체는 소비되고 있다. 소비되는 량이 많은만큼 활용되는 양상도 다양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영화나 드라마이다.
서사는 없고 사이다, 도파민, 자극, (주인공 혹은 빌런의) 파멸.. 요즘 영화/드라마에는 이런 내러티브들만 폭죽처럼 남아가는 것 같습니다. 저도 공감하고 있던 주제인데..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으며, 시의적절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웹소설이나 웹툰이 K-콘텐츠 산업으로 주목받으면서 소위 '사이다', '반서사' 같은 키워드들이 떠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벨피아 같은 인터넷 창작소설 사이트에서도 이런 논의가 많이 오갔었고요.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전체 서사를 수십 개로 세세하게 쪼개어서 하나하나에 속시원한 클라이맥스가 없으면 사람들이 금방 이탈하는 구조인 것 같습니다. 가로세로 수 미터짜리 거대한 예술작품을 가로세로 10cm 짜리 격자로 나눈 조각들을 하나하나 감상하려 하고, 작품의 왼쪽 위 수 개의 조각들만 보고 나서 아니다 싶으면 바로 떠나 버리는 관객들처럼요. 이야기의 도입과 전개는 가급적 줄여야 하고, 부득이 들어가야 한다면 최대한 빠르게 제껴야 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제가 봤던 매체들에서 생각나는 것이, "시련과 비극으로 차근차근 빌드업하는 작품이 인기를 얻던 시절은 사회가 안정되고 황금기일 때였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역경을 극복하는 서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해소를 기대한다", "독자들은 심리적 결핍 상태이며 그 결핍을 충족시키는 짧은 일화들만이 빠르게 반복된다" 같은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서사연구 및 구술사연구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컨대 '서사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의 시야 밖으로 사라진 것이어서, 오늘날의 변화한 서사를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을 Homo Narrans, 즉 이야기의 동물이라고까지 하는데, 서사가 사라진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서사에 대한 관심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같은 고민들은 파고들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고민의 경우, 예컨대 소설 창작 커뮤니티들에서는 "이세계에 떨어져서 아무런 시련 없이 최강의 마법사로 군림하던 나, 어느 순간 다른 모든 도전자들 역시 나처럼 이세계에 떨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야, 너두?"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비틀면서 기존의 반서사적 콘텐츠를 서사적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는데, 서사가 사라져가는 흐름을 되돌리고자 한다면 충분히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많이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요약본에만 익숙해져 인물의 서사가 탄탄히 받혀주는 이야기를 보기가 힘듭니다. 얼마전에 본 영국드라마는 아직 그 서사가 남아 있어 인상적이었어요^^
좋은 글 잘 읽었으며, 시의적절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웹소설이나 웹툰이 K-콘텐츠 산업으로 주목받으면서 소위 '사이다', '반서사' 같은 키워드들이 떠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벨피아 같은 인터넷 창작소설 사이트에서도 이런 논의가 많이 오갔었고요.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전체 서사를 수십 개로 세세하게 쪼개어서 하나하나에 속시원한 클라이맥스가 없으면 사람들이 금방 이탈하는 구조인 것 같습니다. 가로세로 수 미터짜리 거대한 예술작품을 가로세로 10cm 짜리 격자로 나눈 조각들을 하나하나 감상하려 하고, 작품의 왼쪽 위 수 개의 조각들만 보고 나서 아니다 싶으면 바로 떠나 버리는 관객들처럼요. 이야기의 도입과 전개는 가급적 줄여야 하고, 부득이 들어가야 한다면 최대한 빠르게 제껴야 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제가 봤던 매체들에서 생각나는 것이, "시련과 비극으로 차근차근 빌드업하는 작품이 인기를 얻던 시절은 사회가 안정되고 황금기일 때였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역경을 극복하는 서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해소를 기대한다", "독자들은 심리적 결핍 상태이며 그 결핍을 충족시키는 짧은 일화들만이 빠르게 반복된다" 같은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서사연구 및 구술사연구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컨대 '서사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의 시야 밖으로 사라진 것이어서, 오늘날의 변화한 서사를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을 Homo Narrans, 즉 이야기의 동물이라고까지 하는데, 서사가 사라진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서사에 대한 관심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같은 고민들은 파고들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고민의 경우, 예컨대 소설 창작 커뮤니티들에서는 "이세계에 떨어져서 아무런 시련 없이 최강의 마법사로 군림하던 나, 어느 순간 다른 모든 도전자들 역시 나처럼 이세계에 떨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야, 너두?"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비틀면서 기존의 반서사적 콘텐츠를 서사적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는데, 서사가 사라져가는 흐름을 되돌리고자 한다면 충분히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많이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요약본에만 익숙해져 인물의 서사가 탄탄히 받혀주는 이야기를 보기가 힘듭니다. 얼마전에 본 영국드라마는 아직 그 서사가 남아 있어 인상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