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 영화라는 기록
《서울의 봄》
영상 분류 중에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있지만, 이 또한 전부의 사실, 사실의 전부라고 보기 힘들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기까지 촬영, 편집 등의 과정 속에 끊임없는 재해석이 반영되는데, 관점(perspective)이란 것을 장착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상업영화라는 것은 '재미'와 흥행요소가 가미되어야하니 '공식'을 따라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적어도 손익분기점을 넘겨야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미 알고 있는 역사를 어떻게 '각색'하고, 현시점에서 어떻게 재조명 시점해야 할 것인가. 사회정치적 함의들과 관객의 취향변화, 관람환경의 변화 속에서. 《서울의 봄》의 손익분기점은 관람객 400만이라고 한다.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1979년 10월26일 ~ 1980년 5월17일 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1979년 10.26 이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는 1968년 체코슬라바키아의 프라하의 봄 에 비유한 것이다. (위키피디아)
1979년 10월26일.
1979년 12월12일.
경상도 출신 육사 4년제 중심으로 조직된 사조직, 하나회.
쿠데타로 만든 정권이 가장 두려워한 건 또 다른 쿠데타였다. 박정희의 비호 아래 하나회는 청와대, 국방부, 육군본부, 수도경비사령부, 공수특전단, 서울 근교 전방 사단 주요 요직에 회원을 거느리며 막강한 위용을 뽐내게 된다. 박정희가 정 유지를 위한 친위대로 삼았던 것.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