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말과 해방기의 최고 영화감독 최인규에 대하여

칭징저
칭징저 · 서평가, 책 읽는 사람
2024/03/27
최인규 감독의 영화 <자유만세>의 한 장면


일제강점기 말과 해방기의 최고 영화감독 최인규에 대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경력을 시작한 영화감독 최인규는 어떤 의미에서 ‘행운아’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영화경력이 집중되어 있는 시기가 1940년대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더욱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는 지점이다.

1940년대 초반은 식민지 조선에서 자의적인 영화제작은 사실상 소멸된 시기였다. 조선의 모든 영화사는 ‘법인 조영’(조선영화주식회사)이라 부르는 단일한 제작사로 통합되었고 여기에 소속되지 않는 이상 영화제작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극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기자재난과 인력난으로 영화제작은 1940년초반의 식민지 시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때였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에서 최인규는 극영화만 모두 9편을 만들었고 기록영화 3편을 포함하고 조감독으로 활약한 영화까지 합하면 도합 13편의 기록적인(?) 제작편수를 자랑하게 된다. 문자 그대로 1940년대는 최인규에게 있어서 줄기차게 영화를 제작한 10년 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물론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반드시 한 감독의 역량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194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복무하고 그 이데올로기에 동화되었음을 승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한 논쟁을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인규는 행운의 여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지속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일견 최인규의 이러한 행운을 그가 스스로 시대적 상황에 투항하는 형태로 처신했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내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최인규 영화의 친일성 혹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비난하고 해방후의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의도적인 혹은 과도한 ‘전향’을 지적하고 있다. 필자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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