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열되는 텍스트, <자유만세>의 공허함
2024/04/05
파열되는 텍스트, <자유만세>의 공허함
이제 이미 조만간 일본이 항복할 것을 예견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한중의 이러한 현실성을 벗어난 주장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일부 연구자의 주장처럼 해방공간에서 무력한 남성 지식인의 패배주의적인 발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럴 경우 최인규의 패배주의는 인정하더라도 그가 대체 왜 이런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게 되는가에 대한 분석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이것을 최인규가 식민지 시기부터 지니고 있었던 ‘영화의 대중적 코드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최인규에게 중요했던 것은 무장투쟁의 사실성과 그것의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이 아니라 그것을 영화적으로 재현하는 관객의 코드에 있었기 때문이다. 최인규에게 필요했던 것은 ‘혁명가’(혜자는 한중을 혁명가로 지칭한다)의 실제활동이 아니라 그것을 대중이 구성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는 말이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어둡고 비밀스럽게 설정하지 않고 백주의 도시로 한 것은 그들의 활약상을 관객들에게 좀 더 분명히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무의식이 투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최인규는 사실 해방후에 레지스탕스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해방전 친일 영화 경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민족이나 혁명 등에 대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고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서 세상을 보았고 그것으로부터 세상을 판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