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과 모윤숙 어떤 사람들이었나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4/04/04
김활란과 모윤숙 어떤 사람들이었나



가물에 콩나듯 이화여대에 갈 때마다 한 번씩 쳐다보고 입을 삐죽 해 주고 오는 동상이 있다. 김활란의 동상이다. 김활란의 본명은 기해년에 태어났다고 해서 ‘기득’이었는데 이 다소 촌스런 이름이 ‘활란’으로 바꾼 건 세례명 ‘헬렌’의 음차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평안도 철산 사람이었지만 서울의 관문인 제물포로 와서 살았고 김활란도 인천에서 태어났다. 전 가족을 기독교로 끌어들인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그녀 역시 기독교인이 됐고 신문물에 눈 뜬 어머니는 딸들에게도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무식하지만 딸들에게 내 무식을 물려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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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조선 여성들의 경우 소녀티만 벗어나면 시집가서 시어머니 수발하고 남편 술상 차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절, 김활란은 이화학당에 입학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이화여대 메이퀸의 역사는 유구하기도 한 모양이다. 그녀가 3대 메이퀸이었다니. 김활란보다 몇 살 아래의 여학생 가운데 유관순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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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헐벗고 있어서 춥겠다.”는 친구의 농담에 “불쌍해 보여야 사람들이 뭐라도 줄 거 아니니.”라고 시니컬하게 대꾸했다는 이 맹랑한 소녀 유관순은 3.1 운동에 참여하고 고향에 내려가서까지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에 체포돼 옥사한다. 그 장례식에 학생 대표로 관 뒤를 따른 사람이 김활란이었다. 김활란도 만세 운동에 가담했고 그 와중에 늑막염에 걸려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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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 후 김활란은 전도대를 조직하여 각지를 누볐는데 아직 일제 체제내로 수용되기 전의 반항적인 기독교 성격상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고 그녀는 북경에 전도 대회를 간 김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그녀는 잠시 귀국하여 YWCA 를 창설하고는 스승들의 격려 속에 본격적인 미국 유학의 길을 걷는다. 학위를 따가는 와중에도 자주 귀국하여 계몽운동 등에 열심이던 그녀는 1931년 마침내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조선 여성 제 1호 박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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