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온 듯 (주말 추천시)

방아
방아 · 시나 소설, 읽고 쓰기를 좋아합니다.
2024/08/17
[ 2024.08.17 주말 추천시 ]

아니 온 듯  /  조영심


갤러리 같은 화장실
앉은 눈높이에 만난 안내문 하나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왔으나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뜻이겠다
변기에 앉아
새삼 이 푸른 행성 생각에 골똘해진다

46억 년 전 푸른 빛을 뿜어
6천5백만 년 전 인류가 생겨 나와
먹고 입고 쓰고 버린 흔적 다 사라지고
그들은 아니 온 듯 다녀갔는데

겨우 300년 동안 지나온 우리의 흔적들은
켜켜이 썩지 않은 비닐층이 되어
새로운 이 지층을 인류세라 명명하려 한다니

이 땅에도 푸른 풀밭은 올 수 있을까
벌 나비 부르며 꽃들은 또 피고 질까
아이들은 발 벗고 뛰어놀 수 있을까

또 100년 뒤 누가
아니 온 듯 다녀가라는
이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볼 수나 있을까

이 행성에서 산뜻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인류세의 어떤 얼룩으로 남을지
일어나 내 흔적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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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추천 시는 제1회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수상작인 조영심 시인의 "아니 온 듯"이란 시입니다. 특정의 수상작인 만큼, 시의 소재나 주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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