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연필> :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칠 때”

신승아
신승아 · 삐딱하고 멜랑콜리한 지구별 시민
2024/03/11

초등학교 입학식을 며칠 앞둔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서울 시내 문구사에 들러 독일제 연필 한 다스와 일제 목공용 샤프 한 자루, 그리고 당시 돈으로 10만 원 대를 호가하던 고급 만년필 한 자루를 선물해 주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필기구를 만지작거리는 내게 아버지는 꽤 비장한 어투로 당부했다. “수업 시간에 필기하거나 숙제할 때는 꼭 연필로 쓰라. 그래야 글씨체가 반듯하이 까리해진다. 샤프는 비상용으로 갖고 댕기믄서 연필 못 챙깄을 때만 쓰라. 그라고 당장은 쓸 일이 읎겠지만서도, 네가 어른 되가 한자리 하모 사인할 일이 억수로 많을끼다. 만년필은 그때 쓰라고 미리 사주는 기다. 알긋제?” 나는 씩씩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연필, 샤프, 만년필. 모두 손에 쥐고 쓴다는 것이 공통점이지만 이들 사이에는 강력한 위계가 작동했다. 연필은 미숙하고 샤프는 성숙하고 만년필은 원숙했다. 어리고 만만해 보이기 싫었던 나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샤프를 애용했다. 연필 길이가 느리게 줄어들고 샤프심이 빠르게 동날수록 일탈의 쾌감은 배가 됐다. 기분이 울적한 날엔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둔 만년필을 꺼내 잉크를 찍어 사인을 휘갈겼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색 잉크가 떨어지며 완만한 곡선을 그릴 때면 문구점 사장님의 말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아버님이 참 멋쟁이 시네요. 보통 만년필은 ‘아들’ 대학 입학 선물로 사 가시거든요.” 성인 ‘남성’들이 가지고 다닐 법한 물건을 고작 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특권처럼 느껴졌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던 삶에 서서히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영원할 줄 알았던 행복은 바닥에 떨어뜨린 유리잔처럼 힘없이 깨어졌다. 집이 두 번이나 쫄딱 망했다. 빚을 갚아가며 집안이 안정 궤도를 되찾아 갈 때 즈음, 아버지가 피서지에서 익사 사고로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 만에 우리 모녀는 야반도주하듯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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