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필
2023/07/21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 분야 책임자로서 당시 미 버클리대학 물리학과 교수였다. 오펜하이머는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였다. 그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언어감각도 출중했고 (6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는데 그 중에는 산스크리트어도 있다.) 직접 시를 쓰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1925년 하버드 대학을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전공은 화학이었으나 나중에는 자신이 정말 관심이 있었던 것이 물리학이었음을 깨닫고  퍼시 윌리엄스 브리지먼에게서 물리학을 배웠다. 하버드를 졸업한 뒤에는 영국 캐번디시 연구소로 갔다. 그의 지도교수는 1897년 전자를 발견한 톰슨이었다. 당시에는 물리학의 중심이 유럽이었다. 1925년이면 독일의 하이젠베르크가 행렬을 써서 (자신은 그게 행렬인지도 모른 채) 뉴턴역학을 대체할 새로운 역학체계를 제시해 양자역학을 정초한 해였다.
당시 톰슨은 은퇴한 뒤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원래 당시 캐번디시 연구소장이었던 어니스트 러더퍼드에가 가려고 했었다. 브리지먼이 러더퍼드에게 추천서를 써 주기도 했다. 그러나 러더퍼드는 오펜하이머를 받지 않았고, 그 지원서를 톰슨에게 넘겼던 것이다. 불행히도 오펜하이머는 실험에 그다지 재능이 있지는 않았다. 브리지먼도 추천서에서 오펜하이머가 실험에 약하다고 적기까지 했었다. 오펜하이머는 영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불안했고 신경과민 증세를 보였으며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기도 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관심도 재능도 없던 실험물리학을 포기하고 이론물리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런 오펜하이머에게는 실험물리학 중심의 영국보다 이론물리학 중심의 독일이 제격이었다. 오펜하이머는 1년 동안의 케임브리지 생활을 청산하고 1926년 늦여름 괴팅겐으로 향했다. 1926년의 괴팅겐은 말하자면 양자역학의 혁명을 주도했던 본산이었다. 물리학과장이었던 막스 보른은 그해 6월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을 제시했다. 오펜하이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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