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던 한여름의 대구

김중혁
김중혁 인증된 계정 · 소설가, 계절에 대해 씁니다.
2024/04/05
photo by 김중혁
기타노 다케시 감독을 생각하면 푹푹 찌는 한여름의 대구가 생각난다. 대구에서 대학을 다니던 어느 여름날, 나는 친구에게서 빌린 비디오테이프를 데크에 넣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는 심심했다. 주인공이 서핑 보드를 들고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갔고, 바다가 나왔고, 다시 주인공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갔다. 화면만큼이나 줄거리도 단순했다. 청소부 일을 하는 시게루는 어느날 쓰레기통에서 서핑 보드 하나를 줍는다. 그날부터 서핑에 푹 빠진 시게루는 바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주인공 시게루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영화는 한없이 조용했고, 담담했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가 ‘세상에는 이런 영화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비디오데크의 전원 스위치를 껐다. 그 이후로 나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팬이 되었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 중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작품이다. 폭력 묘사가 많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며, 기타노 다케시 본인이 배우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역시 끝까지 보고 나면 기타노 다케시 감독 특유의 리듬을 느낄 수 있다. 말을 하는 사람 대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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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 문서, Pages, Obsidian, Ulysses, Scrivener 등의 어플을 사용하고 로지텍, 리얼포스, Nuphy 키보드로 글을 쓴다. 글을 쓸 때는 음악을 듣는데 최근 가장 자주 들었던 음악은 실리카겔, 프롬, 라나 델 레이, 빌 에반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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