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질병

곽경훈
곽경훈 인증된 계정 · 작가 겸 의사
2023/03/13
페리클레스의 최후

늦은 오후의 태양은 항구를 비스듬히 비췄다. 짭짤한 냄새를 머금은 기분좋은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왔다. 평소라면 항구가 붐빌 수밖에 없는 날씨와 시간이 분명했다. 부두는 배로 가득할 것이며 짐을 내리는 인부의 거친 숨소리가 들릴 것이다. 짐은 식량 같은 생필품부터 상류층의 사치품까지 다양할 것이며 가운데는 델로스 동맹의 도시들이 보낸 공물도 있고 무역을 통해 구매한 물품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선뿐만 아니라 한 켠에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도시와 상선을 약탈하고 돌아온 전함도 있을 것이다. 햇볕에 그을린 갈색 피부 아래 매끈한 근육을 자랑하는 수병과 노잡이는 도시에서 보낼 달콤한 휴식을 기대하며 저마다 무용담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항구, 위대한 아테네의 관문과 같은 피레우스는 한산했다. 평온한 것이 아니라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부두에 정박한 배의 숫자는 제법 많았으나 짐을 내리는 인부도, 무용담을 떠드는 수병과 노잡이도 찾을 수 없었다. 몇몇 배에는 인기척이 있으나 어둡고 우울한 느낌, 떨쳐버릴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피레우스 전체를 짓눌렀다. 

노인은 꽤 오랫동안 우두커니 항구를 바라보았다. 가늘고 깊은 눈매, 날카로운 콧날, 곱슬거리는 수염을 지닌 노인은 화려하지는 않으나 고급스런 차림새로 미루어 상류층이 틀림없었다. 또 딱 벌어진 어깨와 팔과 다리에 아직도 남아있는 촘촘한 근육으로 볼 때, 젊은 시절에는 전장을 누빈 용사였을 가능성이 컸다. 

"페리클레스님, 곧 군사위원회가 있습니다."

노인을 수행하는 젊은 남자가 말했다. 남자도 고급스런 차림새이며 단검으로 무장했으나 자유민이 아니라 노예인 듯 했다. 남자의 말에 페리클레스라 불린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항구를 떠났다. 피레우스의 을씨년스런 모습만큼 노인의 마음도 황량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피레우스는 활기가 넘쳤고 노인의 마음에도 자신감이 가득 했다. 사실 지난 30년 간 노인의 마음에서 자신감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이십대 후반부터 지휘관으로 아테네의 강력한 함대...
곽경훈
곽경훈 님이 만드는
차별화된 콘텐츠,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몇 권의 메디컬에세이를 쓴 작가 겸 의사입니다. 쓸데없이 딴지걸고 독설을 퍼붓는 취미가 있습니다. <응급실의 소크라테스>,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반항하는 의사들>, <날마다 응급실>, <의사 노빈손과 위기일발 응급의료센터> 등의 책을 냈습니다.
45
팔로워 232
팔로잉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