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질문은 내게 먼저 던져야 할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밥 먹기 위해서 글을 쓴다. 생계형 글쟁이다. 그래서인지 작가 김훈이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나무 펴냄)에서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일갈한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학창 시절, 나는 정말 잠깐 문학에 대해 고민을 했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법대를 강하게 원하셨던 부모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는 효자(?)였던 만큼 나는 결코 학과 선택에서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법대를 지원했다.
인재를 몰라보는 그 학교는 안 가는 게 더 낫다고 눙쳤지만 보기 좋게 낙방한 나는 분루(憤淚)를 삼키며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렸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아주 다행한 일이 일어났다. 유식하게 말해 전화위복(轉禍爲福). 재수 시절, 맹장염 수술이 잘못돼 복막염이 되면서 병원에 꽤 오래 입원하는 일이 발생했다. 급기야 이 사태는 나의 법대 진학 프로세스에 막대한 차질을 초래하였고, 성적에 맞춰 문사철(文史哲)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글은 왜 쓰느냐는 질문 앞에서,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법대에 갔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보면 대학에 들어가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시절 잠깐 스쳤던 문학이 크게 와닿았었다. 그래서 문학 공부한답시고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비롯하여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를 베껴 쓰기 시작했다.
공책에 작가들의 주옥같은 문장들을 모나미 볼펜을 꾹꾹 눌러 써나갔지만 공허함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게 문학을 사치로 느끼게 했던 당시의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최전방 철책선 앞에서 나는 그게 소질 없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