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소리의 후일담 : 《노량》(2023)

김터울
김터울 · 연구자, 활동가, 게이/퀴어.
2023/12/22
역사의 물성을 잘 옮겨놨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는 서사가 없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서사로 요약하기가 어려운, 이야기가 뭉쳐있고 멍울져있는 느낌에 가깝다. 서사가 하나가 아닌 여러 겹이 뭉쳐 있을 때 사람은 보통 거기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 속 명군과 왜군과 조선군의 입장과 감정에 그런 역사스러운 중층성이 전작과 달리 잘 강조돼있고, 그것이 잘 휘발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영화의 연출이 알뜰하고 함축적이다. 정유재란의 종결을 앞두고 3국의 입장이 전부 다르다는 걸 영화가 빠르게 전달할 동안, 관객은 영화가 재현하는 이야기의 물성에 대체로 압도된다. 중층적 감정이 또다른 중층적 감정으로 이어지는 이 영화의 특질은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연기 속에 잘 녹아들어있다. 모든 배우가 매 순간 하나 이상의 감정을 연기하고, 심중을 읽기 어려운 사람의 표정은 하나로 명쾌히 정리할 수 없는 사건의 결처럼 더없이 현실적이다. 

동아시아 3국 사이의 전쟁에서 전공의 증거로 사용된 목이 잘린 수급들은, 그것이 본래 조선군의 머리인지 일본군의 머리인지, 조선군의 머리인지 조선 내 민간인의 머리인지, 조선 내 민간인 중 왜군에 투탁한 이의 머리인지 그렇지 않은 이의 머리인지를 전반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저항과 부역의 종이 한장 차이 간극은 전쟁이 창출하는 대표적인 물성 가운데 하나고, 그것이야말로 열전을 치른 한국 현대가 어느 곳보다 통절히 겪은 바다. 그 구분할 수 없음의 감각이 영화의 중핵이다.

이 영화의 중층성이 역사를 닮았다는 건, 영화의 연출이 덜 양식적이고, 서사와 상징을 일부러 비비 꼬아놓았단 생각이 덜 든다는 뜻이다. 박찬욱과 정서경의 각본에서 주로 엿보이는, 그 자체로 흥미롭기는 하나 종종 작위적인 미학같은 느낌이 이 영화에는 확실히 적다. 신파와 감상주의도 쓰긴 쓰는데, 그것이 (쿠키를 제외하고)현실과 철저히 분리된 어떤 맥락에서만 그 나름의 (역시 중층적인)이유를 입은 채 활용되고, 따라서 이물감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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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을 묻다』(숨쉬는책공장,2015), 『세상과 은둔 사이』(오월의봄,2021), 『불처벌』(휴머니스트,2022,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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