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 어조를 여성적 어조로 남길 수 없으므로

이재랑
이재랑 · 살다보니 어쩌다 대변인
2021/11/10

 고2들 문학 수업을 할 때였다.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어조를 설명하다가 "이 시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어조를 예전엔 ‘여성적 어조’라고 그랬는데 그건 성차별적 언어니까 아무래도 지양해야겠지"라고 했더니 학생들이 웃는다. 쌤, 그게 왜 성차별적 언어에요. 그럼 너희가 생각하는 성차별은 뭔데? 음, 여성전용주차장? 

 이런 한남들,이라 쏘아부치고 싶어도 그래선 안 된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먼저 물어야만 한다. "여성만을 위한 전용 공간은 남성에 대한 차별이니까"라는 답을 듣고나면 그제서 "그럼 ‘장애인전용주차장’은 비장애인에 대한 차별일까?"라고 되물을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한 집단에 대한 우대가 곧 다른 집단에 대한 차별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그제서야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논할 수 있다. 그래야만 논쟁이 시작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상대방의 주장을 내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 한 말은 다 헛소리다. 이런 게 통할 리 없다. 어차피 이 대화가 끝나면 모두들 다시 유튜브와 페이스북으로 돌아가 각자의 알고리즘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친절하게 말해야 하는가. 물론 목구멍이 포도청인 까닭으로. 돈을 받는 이상 학생들을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이 변화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면 결국 가르친다는 내 존재 이유 역시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러니 나는 당신이 변할 거라 긍정해야만 한다. 그것이 밥벌이를 위해 내가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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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는 더디다. 더딘 정도가 아니라 자주 퇴행한다. 올해 고3 수업을 위해 <EBS 수능특강> 문학책을 펴는 순간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는데, 이를테면 책에는 이런 시가 있는 것이다.

 “일곱 달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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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정의당/청년정의당 대변인 (~2022) 10년 차 사교육 자영업자. 작가가 되고 싶었고, 읽고 쓰며 돈을 벌고 싶었고, 그리하여 결국 사교육업자가 되고 말았다. 주로 학생들의 한국어 능력과 시험성적을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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