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독신] 은유, 신의 언어 그리고 뉴진스

darmacoma
darmacoma · 목사. 작가. 아빠.
2024/09/16
뉴진스 @ 2024 TMA
신은 원래 어려운 거다. 그게 맞는 거고, 그래야 한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는 신을 모르며 또 그게 맞는 거다. 신을 안다고 ‘각 잡고’ 말하는 자는 결국 독신자(blasphemer)로 끝난다. 그런 자는 좀 더 나아가 ‘내가 신이다’라며 뒤꿈치를 쳐들기 십상이다. ‘아돈노’는 경건의 필수적 필요조건이며 좋은 목사를 구분하는 좋은 기준이다. 둘러보시라, 신의 불가지성(unknowability)이라는 고전적 교리/조직신학적 주제를 뒷방늙은이 취급하다가 ‘신 없는 신자(godless believer)’가 되는 부조리한 사태에 처한 크리스천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돈노’를 모르면 ‘아돈캐어’가 된다. 신이 어쨌건 자기 욕망을 좇는 자가 된다. 타락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심장부에는 이 패러독스가 있다. 경배의 대상인 신을 알아가는 일의 밑바닥에 ‘그래도 나는 신을 모른다.’는 되뇜을 끊임없이 유지하려는 노력이 깔려 있다는 것. 패러독스에 스며있는 다이내믹은 본질이지만 쉽지가 않다. 기도 수행의 한 목표는 한평생 ‘아돈노’의 태도로 납작 엎드려 사는 것이다.
   
계시저 알 수 없는 신의 뜻/의미를 우리 인간이 캐치하는 프로세스 전반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서 인간 언어만을 생각하는 건, 내가 보기에, 일종의 바바리즘이다. 어째서 현대 교회가 바짝 말라붙었는까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이것이다. 신의 뜻은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빛으로, 때로는 촉감으로도 인간에게 전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톨레 레게’ 사건이 온전히 인간 언어로만 이루어진 계시였나? 그리스도교 역사의 변곡점이라 할만한 이 사건에는 소리라는 물리학적 현상, 노래라는 예술형식이 개입되어 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 문화를 넘어 서구 문명의 토대를 세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톨레 레게’ 사건의 최종 결론은 들려온 노래에 따라 집어든 성경에서 로마서 13:13~14를 읽었다는 ‘말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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