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345편 - 오늘이 빅토르 최 탄생 62주년 되는 날, 그를 기억해 본다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6/26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따지고 보면 비록 모계지만 빅토르 최도 차이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의 피가 섞여 있는 셈이다. 짜이꼽스끼와 똘스또이를 역사교과서에서 삭제하고 있는 현재 우크라이나가 설마 빅토르 최에 대한 노래나 흔적 등을 지우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진 : 빅토르 최, 출처 : 리아 노보스찌, 빅토르 최 기념사업회

그는 1980년대 중반 소련 사회의 급진적 개혁의 시기였던 뻬레스뜨로이까 시절에 청년 대중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구소련 국가에서 그만한 인기를 가진 스타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던 전무후무한 최고의 락 가수이자 그룹 키노(Кино)는 최고의 락 그룹이다. 당시 소련 정부가 락 음악을 허가함으로 인해 신문들은 락 콘서트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게 되면서 빅토르 최와 그의 그룹인 키노(Кино)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절 빅토르 최와 그의 그룹 키노(Кино)는 그 노래가 지금 러시아, 러시아 뿐만아니라 소련에 속해 있었다가 독립한 구소련 국가 가요계에서도 끝없이 리메이크 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키노의 노래들에는 당시 청년층의 세계관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공산주의 보수적 관료주의 물들어 있는 기성 세대와 다른 공산주의의 시대적인 일탈을 꿈꿔온 자유를 갈망한 젊은이들의 언어로 쓰여진 키노의 노래는 젊은이들이 쉽게 공감하는 깊이와 시적 울림을 갖고 있었다. 뻬레스뜨로이까 시기의 락 음악에서 키노의 라이벌이자 또 다른 그룹인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의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Борис Гребенщиков)는 키노와 빅토르 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빅토르는 단순, 명료, 진실 그 자체다. 그와 같은 가사를 쓴 사람은 러시아에서 아무도 없었다. 그가 데뷔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내가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제 뒤로 물러나고 자네들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룹이 될거야’ 라고했다. 그러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빅토르 최의 노래 대부분이 한 개인이 겪고 있는 감정에 대한 것이 많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징이었던 히트곡 ‘변화(Перемен)!’도 그가 직접 작사한 노래였다. 사람들은 이 노래 속에서 소련식 생활방식의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지로 합리화했다. ‘변화(Перемен)!’가 수록된 엘범이 처음 공개된 것은 1986년이었지만 다음 해 개봉한 뻬레스뜨로이까 시기의 전설적인 영화 <아싸(Асса)>로 인해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서 변화(Перемен)는 ‘뻬레스뜨로이까를 상징하는 노래’로 각인되었다.

이 노래의 배경은 당시 빅토르 최가 보일러공으로 일했을 때인데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그 자체가 별로 힘들지 않았으며, 교대 사이에 휴식 시간이 많은 교대 근무제로 조직되었다. 특히 집회, 행진, 기타 공적인 행사들에 참석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빅토르 최가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일러실은 구역의 당시 소비에트 시스템에 의하면 중앙화된 난방 시스템에서 한 지역의 기술적 문제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보일러실은 구역의 온수 파이프를 관리하는 제어장치와 밸브들이 있는 방이었고 기술자들이 하는 일은 파이프의 압력을 확인하고 온수와 냉수를 켜고 끄며, 어쩌다 문제가 생기면 수리공을 부르는 일 따위가 고작이었다. 

보일러실 기술자들은 근무시간 내내 보일러실에 있어야 했지만, 그 안에서 그들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4일에 한 번씩 24시간 교대제로 일했다. 비록 한 달에 60~70루블로 공공기관 임금 중 가장 낮았지만 이 직업은 엄청나게 많은 자유시간을 제공했다. 당시 많은 아마추어 락커들이 이런 직업을 가졌고, 그들은 은어로 "보일러실 락커"라고 불렀다. 음악가로서의 전문적 지위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없었던 그들은 얼마간의 돈을 벌면서 소비에트 의무고용법도 만족시키고 더불어 음악에 쓸 최대한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했다. 현재 보일러실은 러시아 락 음악의 성전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한 빅토르 최의 음악들이 자신이 소련의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던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 인근 유르말라 슬로카-탈시(Jurmala Sloka-Talsi) 도로 35km 지점에서 오전 11시 28분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오는 버스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 건질 수 있었던 온전한 물건은 그의 유작으로 알려지게 된 앨범인 Кукушка (뻐꾸기)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팬들은 KGB가 의도적으로 빅토르 최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빅토르 최가 당시 소련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서 버스가 고의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죽음에 대해 의문스러운 것이 많긴 하다. 그가 졸거나 교통법을 위반하지 않았고 버스가 오히려 돌진했다는 것이고 버스 기사가 갑자기 사라졌으며 목격자들의 증언들이 재판에서 모두 기각되었다는 것, 시체가 부검 없이 서둘러 관에 담아 매장했다는 것 등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현재도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건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참 묘한 죽음이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노래가 얼마나 되는지, 뻐꾸기야 말해봐, 노래해봐 (Песен ещё не написанных сколько? Скажи кукушка, пропой)로 시작되는 가사인 빅토르 최의 유작 Кукушка (뻐꾸기)..

원래 슬라브족 전설에 의하면 뻐꾸기에게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느냐" 라고 물으면 뻐꾸기는 남은 햇수만큼 울어서 알려준다고 한다. 이 뻐꾸기를 빅토르 최가 마지막으로 녹음했을 때 초이의 남은 생애의 날짜를 몇 번이나 예측하고 울었을까?.. 나도 엠게우 학위 과정 때 젤 좋아했던 노래가 Группа Крови (그루빠 끄로비, 혈액형)이었다. Кино (키노, 빅토르 최가 소속된 그룹)에 환장했던 나는 지금도 다운받아 듣고 다닌다. 그가 탄생한지 오늘이 62년째 되는 날, 빅토르 최를 기억하며 오늘도 그의 전곡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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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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