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소설: 들국화를 꺾는 소년]

안순우
안순우 · 시와 소설을 사랑합니다.
2023/10/05


가을 추수를 끝낸 빈 들판에는 볏짚 낟가리들이 군데군데 무덤처럼 우뚝 솟아있다. 추수 후 남은 지푸라기와 쭉쟁이를 태우는 연기가 해질녘 들판에 낮게 깔렸다. 논 가까이 다가가보니 벼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 속에서 어느덧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다. 또 논두렁에는 진녹색 쑥대 끝에도 연두색의 새순이 올라오고 있다. 생명은 참으로 신기하다. 말라죽어가는 쑥대 끝에도 또 베어진 벼 그루터기 속에서도 생명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차가운 서리가 내리면서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죽어가는 이 시점에 마지막 남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연한 새순과 그루터기의 새싹으로 피어 올리는 것일까?  

논에는 농부가 쟁기로 보리 파종을 위해서 긴 이랑을 짓고 있다. 찹찹한 가을 공기에 모가지에 멍에를 맨 암소의 입에서는 하얀 김을 연신 뿜어내고 있다. 쟁기가 땅속 깊이 박히자 암소가 힘에 부쳤는지 입에는 하얀 거품을 물고 느린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때 뒤에 있는 농부는 고삐의 줄로 사정없이 때린다. 암소는 무기력하게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너편 논에는 이미 보리 파종을 끝냈는지 씨앗 위에 흙을 덮기 위해서 소 멍에에 호시를 매달았다. 농부가 고삐를 쥐고 앞서서 걸어가고 소 멍에의 줄에 매달린 호시 위에는 어린 아들이 타고 있다. 신이 난 아이는 소 뒤에서 무엇인가 소리치고 있었다.   

초등학교 수업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명호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바쁘기만 하다. 며칠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일을 오늘은 기어코 하리라! 아침에 학교에 가든 길에도 눈여겨보았던 산 아래 언덕배기에 노랗게 핀 들국화가 익어간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국화 한 아름을 꼭 꺾어가야지! 명호의 마음은 간절했다. 명호는 유달리 봄과 가을에 피는 두 꽃을 좋아했으니 진달래와 들국화다. 지난봄에도 동네 앞에 있는 아랫골에 마치 산불이 난 것처럼 온 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날도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오다가 발걸음을 산으로 옮겼다. 아이들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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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불멸성과 불가해성을 고민합니다. 가장 존귀하지만 또 가장 부패한 인간 연구에 천착하여 틈틈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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