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7
개인적인 일화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학위 문제로 진로를 고민하던 중에 어떤 분께서 제게 마르크스는 이제 '낡아서' 더 이상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연구주제는 '플라톤' 철학이었지요. 수천년도 더 된 플라톤 연구자가 수백년도 안된 마르크스 연구자의 주제가 낡았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곳, 그게 한국입니다. 한국의 학계에는, 적어도 상위의 대학원에서는 마르크스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학술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계보에 속하시는 분들 중에도 마르크스 자체를 연구하지는 않는 분들이 꽤 많고 그걸 전공하고 싶다고 했을 때 먹고 살기 힘들다며 말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오는 주요한 논거 중 하나가 '마르크스는 낡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가끔 '대안'으로 추천하는 게 칼 폴라니입니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어보기는 했는지 의문입니다. 이제 얼룩소에 올라온 어떤 글에 보니 폴라니가 왜 마르크스의 곁가지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더군요.폴라니의 사유의 근간은 마르크스에 의해 규정됩니다. 비록 폴라니는 많은 부분에서 당대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지만 폴라니가 가장 열광적으로 찬사를 던졌던 책이 바로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수고>입니다. 그의 표현을 직접 빌려 말하자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는 불명료할 뿐만 아니라 "매우 의심"스러운 지점이 있지만, "인간 정신과 사회에 대한 언급은 명백한 진리이며 매우 중요"한 통찰을 지니고 있습니다.(칼 폴라니,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홍기빈 역, 책세상, 2002, p. 88.) 폴라니가 자본주의를 '악마의 맷돌'이라 부르며 비판할 때 근거가 되었던 '허구적 상품'으로서의 화폐, 노동력, 토지의 존재는 모두 마르크스의 입론을 수용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 체계가 자본=토지소유=임노동=근대국가=국제관계=세계시장의 순서대로 전개되는 '플랜'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
그런데 이런 분들이 가끔 '대안'으로 추천하는 게 칼 폴라니입니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어보기는 했는지 의문입니다. 이제 얼룩소에 올라온 어떤 글에 보니 폴라니가 왜 마르크스의 곁가지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더군요.폴라니의 사유의 근간은 마르크스에 의해 규정됩니다. 비록 폴라니는 많은 부분에서 당대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지만 폴라니가 가장 열광적으로 찬사를 던졌던 책이 바로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수고>입니다. 그의 표현을 직접 빌려 말하자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는 불명료할 뿐만 아니라 "매우 의심"스러운 지점이 있지만, "인간 정신과 사회에 대한 언급은 명백한 진리이며 매우 중요"한 통찰을 지니고 있습니다.(칼 폴라니,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홍기빈 역, 책세상, 2002, p. 88.) 폴라니가 자본주의를 '악마의 맷돌'이라 부르며 비판할 때 근거가 되었던 '허구적 상품'으로서의 화폐, 노동력, 토지의 존재는 모두 마르크스의 입론을 수용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 체계가 자본=토지소유=임노동=근대국가=국제관계=세계시장의 순서대로 전개되는 '플랜'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
@spero306 별말씀을. 감사합니다. 선거철이라 일이 많아서 막 밀리고 있는데 슬슬 정리되고 있으니 조만간 또 다른 방식으로 찾아뵙고자 합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르크스를 조금이라도 탐독해본 사람이라면 무릎을 탁 칠수밖에 없는 좋은 글이네요. 마르크스의 사상이 참 쉽지 않은 게 3000쪽짜리 자본론 하나 읽어서는 그걸로 작금의 현대를 설명하기가 참으로 난감하다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일반 직장인들은 물론 독해력이 다소간 미흡한 대학생들이 자본론 3권 독파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읽고나서보니 엔간한 자기계발서만큼도 현대사회를 적용하여 설명할 만한 건덕지가 없다고 보면.. 좀 허탈하죠ㅎㅎ 마르크스는 죽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손 선생님처럼 마르크스가 읽은 수많은 사상가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경유해서 마르크스를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면.. 이해가 깊어질수록 마르크스의 매력은 배가되는 것 같습니다. 품은 많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성과가 있는 것 같은..ㅎㅎ 앞으로 출판될 책과 개최될 세미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건필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괜한 시간 낭비를 한 글이 되어버렸다.
넵! 그 부분에는 저도 적극 동의합니다 :) 저도 제 댓글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형우 저는 말씀하신 바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본인들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그냥" 하면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굳이 마르크스는 죽었다, 같은 도발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본인 생각을 얘기하고 자신이 어떠한 사조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그 사조들의 문제의식에서 어떤 부분을 발전, 계승하였다. 만약 같은 부분에서 지적인 자극을 받았다면 서로 동일한 지반 위에서 논의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만입니다. 애당초 사회주의 사조에서 마르크스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보니 경유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마르크스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 라기보다는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 에 가깝다는 게 제 생각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복잡한 논의들이 더 많으니 예컨대 AI와 같은 문제에서 반드시 마르크스만을 경유할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그런 건 그냥 자기 생각 얘기하면 됩니다. 굳이 도발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기에는 생각보다 20세기에 남은 지적 유산이 크기 때문에 굳이 그걸 부정하려는 무의미한 다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제 논지입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그냥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혁명읽는사람님의 독서력은 대단하십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을 배제한 채로 사회주의를 논할 것 없다는 것"이라는 부분에는 저도 일견 동의를 합니다. "마르크스는 죽었습니다. 더 이상 사회주의를 공부할 때 자본론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19세기에 썼습니다."라는 발언은 충분한 비판의 여지가 있지요.
다만 악담님의 글에 댓글을 통하여 비판하고자 한 것은 하나였습니다. 이완님은 현재 학계에서 활동하는 분이 아닌 것 같고, 얼룩소가 학계의 연구 성과물을 발표하는 자리가 아닌데, 왜 꼭 기필코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서는 사회주의를 논하지 말라는 자세가 되어지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의 영향을 받은 다른 학자를 통해 마르크스가 보고자 했던 것을 볼 수도 있는 것이며,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개념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제가 꼭 마르크스를 읽혀야 하는 반발을 한 것이며, 폴라니는 폴라니 나름대로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나름대로 그 시대에 질문을 던지고자 한 바를 토대로 공론장에서는 이야기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논의에 뿌리 가지 논의가 필요하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질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논의의 현장이 학계에서처럼 엄밀성을 강조하며 이루어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폴라니에 대하여 몰랐던 바를 많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날라리인지라 전혀 몰랐던 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형우 특정한 사조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게 그 사조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학문세계 전체를 특정 사조로 '환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둘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지적하는 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을 배제한 채로 사회주의를 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학이 공자의 텍스트에 근거해서 그것을 비판하기도, 수용하기도, 변용하기도 하는 등의 여러 과정을 거쳐 확장되었던 것처럼 현대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입장차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었기에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배제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섬세하지 못하기에 비판받아야 한다면 영향력을 강조하는 제가 아니라 마르크스는 죽었다고 단언하는 글이 아닐지요?
그리고 폴라니는 경제사학자도, 경제인류학자도 아닌 경제학자로 보는 게 가장 타당하겠지요. 그는 경제사학자로서도 문제가 많고 경제인류학자로서도 문제가 많습니다. 가령 그의 제자이자 함께 연구했던 저명한 고대 그리스 사가 모시스 핀리는 폴라니 사후 그의 유고를 편집해 낸 <인간의 살림살이>에서 고대 그리스 분야 전체를 빼려 했습니다. 역사학자로서의 입장에서 볼 때 폴라니의 역사연구는 역사학에 미달할 뿐만 아니라 문제가 많다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는 사료를 엄정하게 분석하는 사학자가 아니라 개념체계를 기존의 연구들에 적용하여 새롭게 구성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그 틀이 역사를, 인류학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용하고 적용하는 것이지, 폴라니 자체는 그렇게 엄밀하게 실증적인 역사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다호메이 왕국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이나 초기 그리스로마에 대한 분석이나 지금 와서 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역시 독서가 혁명읽는사람님의 글은 경탄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약간은 '서양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OO 이전까지는.'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각각의 학자는 각각의 학자가 만든 세계관 나름대로 존중받으며, 그에 맞추어서 그가 자신의 시대에서 말하고자 한 바를 봐야지. 누구누구의 조류라는 계보를 파고들며, 누구누구학파라는 것이 지나치게 강조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백승욱은 김진균의 비판사회학을 뒤이은 계보로 칠 수 있기에 김진균주의자로 명명하며, 백승욱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고 김진균의 워딩에서 이어붙여서 생각해야 합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를 함에 있어서 개념을 따라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가 공론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가 공론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 시대에 어떤 물음을 던지고자 했는지를 우선적으로 봐야지, 그가 누구누구의 뒤를 이은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그 틀에 맞추어서 그의 의견을 구성하는 것은 오히려 소통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지 않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폴라니는 경제인류학자로 분류하는 경향들이 점점 쌔지고 있으나, 폴라니는 경제인류학의 연구들을 어느 정도 참고한 경제사학자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인류학은 대부분 참여관찰기록지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지고, 폴라니는 사료를 중심으로 경제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인류학자들과 그렇게 활발히 교류하지 않았습니다.
@서형우 저는 말씀하신 바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본인들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그냥" 하면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굳이 마르크스는 죽었다, 같은 도발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본인 생각을 얘기하고 자신이 어떠한 사조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그 사조들의 문제의식에서 어떤 부분을 발전, 계승하였다. 만약 같은 부분에서 지적인 자극을 받았다면 서로 동일한 지반 위에서 논의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만입니다. 애당초 사회주의 사조에서 마르크스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보니 경유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마르크스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 라기보다는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 에 가깝다는 게 제 생각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복잡한 논의들이 더 많으니 예컨대 AI와 같은 문제에서 반드시 마르크스만을 경유할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그런 건 그냥 자기 생각 얘기하면 됩니다. 굳이 도발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기에는 생각보다 20세기에 남은 지적 유산이 크기 때문에 굳이 그걸 부정하려는 무의미한 다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제 논지입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그냥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르크스를 조금이라도 탐독해본 사람이라면 무릎을 탁 칠수밖에 없는 좋은 글이네요. 마르크스의 사상이 참 쉽지 않은 게 3000쪽짜리 자본론 하나 읽어서는 그걸로 작금의 현대를 설명하기가 참으로 난감하다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일반 직장인들은 물론 독해력이 다소간 미흡한 대학생들이 자본론 3권 독파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읽고나서보니 엔간한 자기계발서만큼도 현대사회를 적용하여 설명할 만한 건덕지가 없다고 보면.. 좀 허탈하죠ㅎㅎ 마르크스는 죽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손 선생님처럼 마르크스가 읽은 수많은 사상가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경유해서 마르크스를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면.. 이해가 깊어질수록 마르크스의 매력은 배가되는 것 같습니다. 품은 많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성과가 있는 것 같은..ㅎㅎ 앞으로 출판될 책과 개최될 세미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건필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서형우 특정한 사조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게 그 사조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학문세계 전체를 특정 사조로 '환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둘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지적하는 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을 배제한 채로 사회주의를 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학이 공자의 텍스트에 근거해서 그것을 비판하기도, 수용하기도, 변용하기도 하는 등의 여러 과정을 거쳐 확장되었던 것처럼 현대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입장차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었기에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배제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섬세하지 못하기에 비판받아야 한다면 영향력을 강조하는 제가 아니라 마르크스는 죽었다고 단언하는 글이 아닐지요?
그리고 폴라니는 경제사학자도, 경제인류학자도 아닌 경제학자로 보는 게 가장 타당하겠지요. 그는 경제사학자로서도 문제가 많고 경제인류학자로서도 문제가 많습니다. 가령 그의 제자이자 함께 연구했던 저명한 고대 그리스 사가 모시스 핀리는 폴라니 사후 그의 유고를 편집해 낸 <인간의 살림살이>에서 고대 그리스 분야 전체를 빼려 했습니다. 역사학자로서의 입장에서 볼 때 폴라니의 역사연구는 역사학에 미달할 뿐만 아니라 문제가 많다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는 사료를 엄정하게 분석하는 사학자가 아니라 개념체계를 기존의 연구들에 적용하여 새롭게 구성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그 틀이 역사를, 인류학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용하고 적용하는 것이지, 폴라니 자체는 그렇게 엄밀하게 실증적인 역사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다호메이 왕국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이나 초기 그리스로마에 대한 분석이나 지금 와서 보면 문제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