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떠올리게 하는 당신께 -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등대로』, 민음사
2024/04/26
친애하는 램지부인께
안녕하세요 부인,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서 기뻐요. 저는 2023년 한국에 사는 40대 초반 여성 안정인이라고 합니다. 『등대로』를 읽고 가장 마음에 와닿는 등장인물을 골라 편지를 쓰라는 주문에 누구를 고를까 오래 망설였어요. 다시 찬찬히 책을 읽은 뒤 당신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 가장 새롭게 다가온 인물이 램지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저는 부인께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모두가 당신의 아름다움과 위엄, 헌신을 찬탄하지만 제 눈엔 당신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늘 공감과 찬사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허약한 내면을 가진 램지 씨를 떠받드는 모습이 답답했고, 그의 불같고 까다로운 성미에 당신이 일조했다고도 생각했어요. 애써 민타와 폴을 맺어주려고 하거나 애초에 결혼 생각이 없는 릴리에게 자꾸 결혼을 강요하는 듯한 모습도 고리타분하게 보였어요.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고개를 흔드는 딸들처럼 당신을 비난했죠.
다시 읽었을 때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2023년을 사는 ‘나’의 시선으로 1800년대 후반 여성의 삶을 판단하는 자체가 온당한지 반성이 들더라고요. 부인은 여덟 아이를 키우는 엄마죠. 아이 둘로도 허덕이는 저는 여덟이라는 숫자에 일단 무릎을 꿇습니다. 아무리 유모와 하인이 있더라도 본디 아이들이란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 뒤치다꺼리만 해도 진이 빠질 텐데 휴가 때 지인들을 초대해 함께 머무르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살뜰히 챙기는 모습에 감탄했어요. 당신은 나눔을 실천하고, 고립된 등대지기 가족에게 보내줄 양말을 손수 짜는 사람이죠. 허기진 맥냅 부인에게 우유 수프를 마련해 주려는 다정함도 돋보였어요. 누구나 쉴 수 있게 시원한 그늘을 내주는 아름드리나무 같은 당신의 너른 품에 저도 기대어 쉬고 싶어졌습니다.
램지부인, 당신을 보며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가 떠올랐어요.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