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평론가와 <괴물> - 이동진이 독을 풀었다

김다움
김다움 · 게을러요
2023/12/18
"오해를 경유해서 이해에 이르는 경험 끝에 관객은 그 햇살 아래서 증인이 된다."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을 '이해'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 같은 영화를 본 게 맞나 싶다. 물론 가능한 감상이다. 그러나 주류여선 안 된다. 주류일 수도 없다. 그런 시각은 극히 일부의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평론가 한 명이 다수의 감상을 지배하는 상황이다. 나는 수많은 이동진 추종자와 아류가 무섭다. '괴물' 같다. 평론엔 정답이 없다. "돼지의 뇌"가 아니라면, 자신의 감상을 직접 말해야 한다. 복사한 평론은 안 쓰느니만 못하다. <괴물> 같은 분열적인 텍스트라면 더더욱.

오해를 경유해 이해에 이른다. 말은 좋다. 영화에 부합하지 않을 뿐이다. <괴물>은 부분적 진실을 다룬다. 시점이 달라질 때, 사실도 달라진다. 사오리는 아동 학대를, 호리는 교권 추락을, 미나토는 학교 폭력을 읽는다. 오해를 경유해 이해에 이르렀다면, 답할 의무가 있다. 도대체 누가 진실인가?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영화의 세 인물은 모두 구체적인 상황에 끼인 행위자다. 객관적인 시점은 불가능하다. 나는 묻고 싶다. "도대체 당신은 어떤 위치에서 봤길래 이해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이해했단 말입니까? 사람인가요? 아니면 '사실'인가요?"

세 사건을 통합하는 객관적인 사실은 없다. 불가능하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아니라, 세 가지 사건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봐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긴다. 만약 당신이 이해했다면, '이상한' 부분을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호리와 사오리는 어떻게 화해했는가? 여기서 영화 탓을 한다. 일견 <괴물>은 개연성에 문제가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연성이 아닌, 시점의 문제다. 누구의 시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상황의 설득력이 달라진다. 나는 묻는다. "당신은 호리와 미나토의 시점만 취급하지 않았았나요?" 그러나 사오리의 시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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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언론을 전공하는데, 그다지 전문적이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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