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혁
문지혁 인증된 계정 · 소설가/번역가
2024/03/22

앞장과 뒷장 사이

  공방의 이름 <렉또베르쏘>는 라틴어로 앞장이라는 뜻의 렉또(recto)와 뒷장이라는 뜻의 베르쏘(verso)를 합친 말이다. 렉또였던 백순덕 선생이 세상과 공방을 떠난 뒤 조효은 대표는 한동안 혼자서 공방을 운영했다. 그사이 공방은 서교동에서 상수동으로, 다시 합정동을 거쳐 연남동으로 옮겼다.
  백순덕 선생의 조카 이효진 씨가 찾아왔을 때 조효은 대표는 그녀가 정말로 이 일을 원하는지 궁금했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이 백 선생에게 그러했듯 이효진 씨가 자신의 베르쏘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조 대표가 <렉또베르쏘>를 책임지고 있는 사이 이효진 씨는 5년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를리외르 자격증을 따서 돌아왔다. 그녀에게 뒷장이 생긴 순간이었다.
  하나의 책은 무수히 많은 렉또와 베르쏘로 이루어진다. 교차하며 커져가는 홀수와 짝수처럼,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두 마리의 우로보로스처럼.

*

  어릴 적부터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들은 나에게 목사가 되라고 했다. 네가 목사를 하면 어울릴 거라고. 늦지 않았으니 신학교에 가라고. 왜? 아버지가 목사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런저런 일을 맡고 있기 때문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린이 수련회에 부흥사가 찾아왔다. 그날 저녁 하루 만에 목이 다 쉬어버린 부흥사는 결단의 시간이라며, 목회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남동생과 나는 서로 눈치를 봤다. 아버지는 그 교회의 부목사였고 우리는 ‘목사 아들’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부흥사는 땀에 젖어 축축한 손으로 우리 머리 위에 안수 기도를 했다. 그리고 나는 소설가, 동생은 만화가가 되었다. 
  그때 우리 옆에 일렬로 앉아있던 수많은 아이들은 다 무엇이 되었을까? 우리는 아버지의 베르쏘가 되는 데 실패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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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수업의 본질이 내용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온라인 비대면 실시간 수업, 그러니까 줌이나 웹엑스를 이용해서 하는 수업들에서 나는 오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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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고잉 홈』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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