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균
유한균 인증된 계정 · 출근시간에 우린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2023/11/22
1. 크레타에서는 무엇이든 진해진다.
크레타에서는 무엇이든 진해진다. 음식도, 사람도, 심지어는 알코올 도수까지도. 어쩌면 강렬한 태양과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 탓일 수도 있다. 혹은 외세의 오랜 지배와 그 저항이라는 역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스 본토와도 결이 다르다. 훨씬 원시적이고 동물적이다.
   
이라클리온 골목 어딘가에 있는 식당에 들어간 적 있다. 우연한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했던 레스토랑이 만석이었기 때문에, 꿩 대신 닭으로 택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먼저 우와- 감탄부터 나왔다. 나무 식탁. 방석은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 털이 숭숭 나 있었다.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이었다. 그래서 커다란 마당에 천을 대어 지붕 삼았다. 한쪽 화덕에는 핏빛이 도는 고기가 꼬치에 꽂혀 장작 옆에서 구워지고 있었다. 거기서 이미 동네 사람들이 대낮부터 시끌벅적하게 술판이다. 
   
"메뉴판 좀 부탁드려요."
   
웨이터는 우리가 외국인이라고 영어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큰일이다. 무슨 음식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동안 먹어온 그리스 본토 음식들과 완전히 달랐다. 겨우 현지 음식 이름에 익숙해지려던 차였다. 기본 문제를 풀다가 심화 문제로 넘어간 꼴이었다. 영어로 쓰여있는 설명을 읽어보아도 알쏭달쏭하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굶을 수는 없는 법. 웨이터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음식이 나와보니 크레타 음식의 매력을 알겠다. 투박하고 강렬했다. 샐러드는 양젖과 염소젖을 섞어 만든 페타 치즈와 오이가 함께 나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신 제우스가 갓난아기 시절 염소젖을 먹으며 자란 곳이 크레타이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걸로 유명하다. 어머니 레아가 몰래 포대기로 쌓아 요정들을 시켜 이 섬으로 보냈다고 한다. 짭조름한 염소젖 치즈를 입에 넣으니 그 신화가 떠올랐다.
   
다음은 크레타 전통 양구이다. 안티크리스토(Αντικριστ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자그마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고기구...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배웠던 공부들이 어느새 거짓말처럼 향 연기마냥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이가 들어도, 그 시절 고민했던 내가 남아있게 글을 남깁니다.
28
팔로워 69
팔로잉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