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삶, 매혹의 만담가 - 김윤심

강부원
강부원 인증된 계정 · 잡식성 인문학자
2023/07/03
 
말년에 요양원 신세를 지며 살았던 시절의 김윤심의 모습(<한겨레신문>, 1990년 2월 23일)


대한민국 여성 희극인의 대모, 김윤심(金允心, 1914~?)
      
“너는 못 생겼으니 더 많이 웃어야 한다.” 

일찍이 이 말을 금과옥조로 알고 ‘무대 위의 삶’을 이어갔던 최고의 여성 만담가가 있었다. 노래가 좋고 무대가 좋아 극단 생활을 시작했지만 박색(薄色)에 노래까지 못한다고 구박받다가, 자기도 몰랐던 만담(漫談) 재능을 발견하고 조선 최고의 만담꾼이 된 김윤심(金允心, 1914~?)의 이야기다. 

작곡가, 연출가는 물론 극단의 선배들마저 이제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무대 위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노래가 안 되면 만담으로, 얼굴이 부족하면 웃음으로, 공연을 못하면 극본을 써서라도 무대 곁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렇게 여성 희극인의 대모(大母)가 됐다.
 
젊은 시절 김윤심의 모습. 출처-동아일보
 
타고난 박치였지만 무대 향한 열정 넘쳐
   
김윤심은 황해도 수안(遂安)에서 태어났다. 평양과 개성 사이에 위치한 수안은 예로부터 양질의 금(金)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으며, 19세기 말부터 근대적 방식의 금광 개발이 이어졌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수안 곳곳에는 ‘노다지’를 캐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또한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문화를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곳이기도 했다. 포목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서양 문화에도 일찍 눈 떠 그녀에게 근대 교육의 혜택을 입게 했다. 덕분에 평양의 명문 ‘숭의여학교’를 들어가게 된 그녀는 학창시절부터 근대적인 노래와 연극에 심취할 수 있었다. 

김윤심은 남들 앞에서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고 즐겼다.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할 때면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흐뭇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숭의여학교 3학년 시절 ...
강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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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과 오래된 잡지 읽기를 즐기며, 책과 영상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인문학자입니다.학교와 광장을 구분하지 않고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나오고 있습니다. 머리와 몸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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