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가서 영어는 안 늘고 한국어는 급속도로 까먹는 이유
유학 가서 영어는 안 늘고 한국어는 급속도로 까먹는 이유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수업은 오직 한국어만 쓰는 것이 원칙이라지만, 나는 제네바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어 수업을 하면서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를 섞어 썼다(나의 프랑스어 수준은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과 비슷하다). 추상적인 개념어일수록 대응되는 번역어를 가르쳐주면서 빨리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나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학생들의 제한된 한국어 어휘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냥 데모크라시(democracy)라고 말해주는 것이 빠르다.
어느 날, '바늘'이란 단어 뜻을 말해주려고 할 때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바늘이 영어로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고, 프랑스어 단어 에귀으(aiguille)만 생각나는 것이다. 내 두뇌 어딘가에 바늘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확실히 저장되어 있고, 나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단어를 금고에 넣고 자물쇠로 잠가 버린 기분이었다. 도저히 그 단어를 꺼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는 하루에 니들(needle, 침)을 수천 개씩 사용했던 한의사가 아닌가!
'에귀으'를 머리 속에 넣는 순간 '니들'은 피융~ 하고 튕겨나가는 걸까? 영어 실력을 유지한 채로 프랑스어 실력을 늘려가는 것은 불가능한가? 프랑스어 단어 하나를 외우면 영어 단어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친구나 선배들이 유학 갔을 때 푸념하던 말이 떠올랐다.
"영어 실력 느는 속도보다 한국어 까먹는 속도가 빨라."
"영어로 하는 말은 한국어로는 잘 안 나와."
"나는 0개국어 구사자야."
나는 그때 그 말들이 엄살인 줄 알았다. 설마 영어를 배운다고 한국어 실력이 퇴화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그 현상을 겪어보니 알겠다. 프랑스어를 배우니 영어 실력이 '잠금' 설정 된 기분이었다. 단어의 망각과는 다른 현상이었다. 이렇게 흔한 현상이라면 당연히 연구도 되어 있으렸다! 나는 언어학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알베르타 코스타의 <언어의 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