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 감상문
2024/03/25
우리는 모두 2010년대라는, 거대하고 부패해가는 짐승의 사체 위에 서 있다. 마치 아이가 죽은 부모의 피부를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만져보듯이, 또 속담 그대로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우리는 이 텁텁하고 물렁물렁해져가는 짐승의 살과 뼈와 체액을 습관적으로 건드려본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 짐승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의 죽음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각각 별개의 일이다.
이 영화는 어린 남자 아이들의 풋풋한 사랑을 다룬다. 영화의 배경은 가고시마다. 무기노 미나토는 영락없는 사쓰마의 와카무샤다. 본래, 사무라이에게 남색은 미덕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퀴어’ 영화가 아니라 남색 영화로 봤다. 그 옛날 명예로운 사무라이들이 행하던 남색은 미나토와 호시카와 사이의 관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가령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같은 퀴어 영화가 아니다. 또 <캐롤>이나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아가씨> 같은 퀴어 영화도 아니다. 무기노 미나토가 싸워야 하는 사회의 편견이란 저 퀴어 영화 속 어른들이 싸워야 하는 사회의 편견보다 훨씬 모호하고 불확실하며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어른들은 사회적 파멸을 두려워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그런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아이들의 두려움은 훨씬 절박하고 실존적인 것이다. 아이들은 진지하게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 그들에게 어른들의 세계, 어른들의 소위 사회적 지위나 평판,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매장, 파멸, 수난 같은 것들은 거의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것을, 자신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복잡한 장난, 놀이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들이 어른들을 ‘강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 어른들은 목숨을 걸지 않고 목숨을 걸 필요도 없는 방식으로 살아갈 줄 알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위기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그 여유가 불가해하게 느껴지면서도, 자신도 어른이 되면 그 여유를 손에 넣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