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연초 씨 구술생애사 (2) "이나까패, 이나까패. 촌새끼라는 뜻이야."

블라시아
블라시아 · cpbc 라디오 작가인 기혼 여성
2024/03/22
할머니의 눈과 무릎, 허리는 96년을 사용했어도 고장나지 않고 버텨주었지만 치아는 그렇지 않았다. 몸의 다른 기관보다 먼저 쓸모를 다하고 부서진 것이다. 5,6년 전부터 앞니를 제외하고 다 빠져버렸다. 자연히 드실 수 있는 음식이 줄었다. 잇몸으로 으깨서 부서지는 음식만 드셨다. 자식들은 임플란트를 하자고 했지만 할머니는 완강히 거부했다. 돈 들이기 싫다는 이유에서다. 고작 몇 년 쓰자고 큰돈을 들이냐며 큰소리쳤던 할머니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예전부터 돈 쓰는 일을 극도로 경계해온 분이다. 그런 할머닐 보면서 나는 사람이 돈을 쓸 땐 써야 함을 절실히 배웠다. 내 자식들이 나를 위해 돈을 쓰려고 하면 기쁘게 받아야지 다짐했다. 
 
이날 할머니집에 가면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지난번엔 차를 가져가느라 두유와 과일 같은 간식을 실어 날랐는데 이번엔 지하철을 타고 가니까 여기서 뭘 사가지 말고 동네 가서 사야지 했다. 할머니를 모시고 가서 점심 먹을 식당도 알아두었다. 이가 없으니 부드러운 음식을 찾다가 집 근처에 전복리조또를 파는 레스토랑을 발견했다. 리조또가 싫다면 차선책으로 갈 죽집도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뭐 좀 사려 했는데 할머니가 역 앞으로 마중을 나오시니 계획이 어그러졌다. 할머니 뭐 드실 것 좀 사자, 싫다, 그럼 먹을 거 말고 다른 필요한 거 사자, 없다, 이가 없어도 드실 수 있는 음식 찾아놨으니 점심은 거기로 가자, 돈 쓰지 마라... 할머니의 거절은 빈틈이 없었다. 지하철에서 한참 식당을 검색했던 터라 배가 고프기도 했고 자꾸 메뉴를 들여다보니 리조또랑 파스타가 먹고 싶어졌지만, 할머니의 철저한 방어작전으로 식당에 가는 건 실패했다. 그날 점심은 할머니가 끓여둔 된장찌개에 밥을 먹었다. 
 
상을 차리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반찬이 죄 김치와 젓갈뿐이다. 달걀도 없다. 배추김치와 동치미, 토하젓, 파래무침, 된장, 고추장, 봉지에 든 사골국물. 할머니랑 함께 살 때 자주 보던 반찬들이다. 치아가 멀쩡하실 때도 고기는 거의 드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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