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숙의 유서
2023/04/18
진영숙의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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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생. 나이 열 네 살의 진영숙은 학교에서 농구부 활동을 할 만큼 훤칠한 키에 조숙해 보이는 여중 2년생이었다. 오후 4시경 영숙은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에 꼼짝없이 머물러 있으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지킬 생각은 없었다. 함께 온 친구들이 물었다. “어머니 언제 오시는데?” 그들 역시 데모에 동참하러 거리에 뛰어들 심산이었다. 영숙은 그래도 어머니를 보고 나가야 한다고 고집했고 그예 영숙의 집까지 함께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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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안되면 우리끼리 나갈게. 너는 나중에 나와.”
“그러지 말어. 같이 나가자고 했잖어.”
친구들의 채근을 받으며 어머니가 돌아올 길목을 애타게 바라보던 영숙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줘. 어머니한테 짤막하게 인사만 쓰고 나갈게. 혹 늦게 들어와도 걱정하시지는 않게.” 그리고서 영숙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열 네 살 소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떨리는 손을 꾹꾹 눌러가며 종이 쪽지를 채워 가기 시작했다. 말똥만 봐도 허리를 꺾고 웃음을 터뜨릴 열 네 살 깻잎머리가 써내린 편지의 서두는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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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간단히 쓰려고 했지만 내용은 자꾸만 길어졌다. 발을 동동 구르는 친구들을 애써 달래며 다급하게 편지를 마무리한 영숙은 종이를 곱게 접어 갠 이불 속에 넣어 두었다.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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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