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기의 기원

이상희
이상희 · 인류의 진화
2024/01/12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나는 바삐 걸었다. 한 손에는 회의 자료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우산을 받치고 빠른 종종걸음과 느린 달리기를 번갈아 가면서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보도를 꽉 채워서 일렬횡대로 걷고 있는 학생들을 앞질러 가기 위해 방향을 급히 틀다가 나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학생들은 괜찮냐고 묻고 젖은 땅에 떨어져 흩어진 내 자료를 모아 가져다주었다. 나는 일단 창피했으므로 괜찮다고 손을 휘젓고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다시 열심히 걸어갔다.

그러고 보면 2-3년마다 한 번 정도는 걷다가 넘어지는 것 같다. 한번은 두 팔에 가득 책을 안고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턱이 계단 바닥과 그대로 부딪혔다. 그때도 아픈 것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괜찮냐고 묻고 여기저기 흩어진 책을 가져다주는 것이 더 창피할 뿐이었다. 나중에 보니 앞니에 살짝 금이 갔는데 그냥 두기로 했다. 치과의사는 그냥 두면 언젠가는 이가 그대로 부서져서 쓱 빠질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다.

걷다가 넘어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 넘어지면 일면식 없는 사람일지라도 주위를 살피고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다 주며 괜찮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아닌 동물들은 넘어지지 않는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동물들은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경우일 것이다. 그냥 멀쩡히 걸어가다가 순간 삐끗하여 넘어지는 사슴이나 열심히 뛰어가다가 순간 발이 엉켜서 넘어지는 영양은 상상할 수 없다. 넘어지는 순간 이들을 노려보던 사자에게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특별히 아프거나 약하지 않아도, 몸이 멀쩡히 건강한데도 걸어가다가 넘어진다. 그 이유는 두 발로 걷기 때문이다. 두 발로 걷는다는 표현은 사실 아이러니다. 두 발로 걷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사실 두 발이 모두 땅을 짚지 않는다. 한 걸음 떼면 다른 발로 땅을 딛고 몸을 지탱한다. 한 발이 땅을 디디는 동안 다른 발은 공중에 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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