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질서의 억압 속에서 꽃피운 자유로운 사랑과 연애 - <운영전>이 말하는 사랑과 이별(3)

칭징저
칭징저 · 서평가, 책 읽는 사람
2023/04/12
신윤복의 <월하정인>

안평대군의 유토피아는 높은 담장으로 외부와 차단되면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토피아는 내부로부터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안평대군과 달리 궁녀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이 있었고, 급기야 운영은 외부 사람과 접촉을 금한 수성궁의 질서를 위반하게 된다. 
   
제 고향은 남쪽 지방입니다. 밖에 나가 놀거나 장난하게 두시었습니다. 저는 숲 속과 시냇가를 돌아다니며 매화, 대나무, 귤나무, 유자나무의 그늘 아래서 날마다 노니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이끼 낀 냇가에서 낚시하는 무리들과 풀 먹이기를 마치고 피리 부는 목동들을 아침저녁으로 보았으며, 그 밖의 산과 들의 모습, 농촌의 흥취 등은 머리털처럼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렵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처음에 삼강행실과 칠언당음을 가르치셨는데, 13세가 되어 주군이 부르신 까닭에 부모님을 이별하고, 형제를 멀리한 채 궁문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지 못해 매일 흐트러진 머리와 때 묻은 얼굴을 하고 남루한 옷을 입어, 보는 사람이 더럽게 여기도록 했습니다. 제가 뜰에 엎드려 우니, 궁인들이 ‘한 떨기 연꽃이 저절로 뜰 가운데서 피었구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부인이 저를 친자식처럼 사랑하시고, 주군도 저를 심상하게 보지 않으시니, 궁중 사람들 가운데 저를 골육처럼 친애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한 번 학문에 종사하게 된 이후부터는 자못 의리를 알고 음률을 살필 수 있게 된 까닭에 궁인들이 모두 저에게 경복하였습니다. 서궁으로 옮긴 뒤에는 거문고와 서예만을 오로지 하여 조예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무릇 빈객들이 지은 시들은 하나도 눈에 들지 않았으니, 재주가 성하게 되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남자가 되어 입신양명하지 못하고, 홍안박명의 몸이 되어 깊은 궁궐에 한 번 갇힌 뒤 마침내 고목처럼 썩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어찌 슬프지 ...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이정민,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276
팔로워 555
팔로잉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