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죠? 이번 총선에 투표하기 싫습니다.

유한균
유한균 인증된 계정 · 출근시간에 우린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2024/03/31
우편함에 선거공보가 들어있었습니다. 외출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이었고, 어느새 벌써 날이 그렇게 되었네 하며 꺼내 들고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생각해보니 투표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더라고요. 동네에 플래카드들이 이리저리 붙어있어 분위기는 알고 있었지만, 정말 코앞이었습니다.
   
집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 봉투를 열었습니다. 각각 후보들의 선거 공약들이 쓰인 인쇄물이 나왔습니다. 큰 정당은 페이지도 많고 색도 다양하고, 작은 정당은 약간은 소박합니다. 그렇게 찬찬히 한번 내용을 읽어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총선에 투표하기 싫습니다.
   
평생을 흔히 말하는 정치 고관여층으로 살아왔습니다. 요즘 세상일수록 오히려 정치는 필수재라고 생각했고, 제 나름의 주관과 사상도 있었습니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절도 있었고, 정당 활동에까지 제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 정치라는 이 ‘게임’을 너무 재밌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선거공보 봉투 속 내용물들을 살펴보다가, 결국에는 이 ‘게임’이 나와 상관없는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기분입니다. 정치란 것은 결국 권력을 어떻게 분배하는지의 문제이고, 그 승패는 선수들의 것일 뿐. 저는 그 게임 바깥의 팬일 뿐일까요?
   
이건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총선에서 질 것 같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그 반대입니다. 그보다는 이 선거공보물과 저 사이의 어떤 벽이 생긴 것만 같습니다. 
   
철학자들은 이런 상태를 예부터 멋지게 ‘소외(疏外)’라고 불렀습니다. 워낙 이론(異論)이 많아 정확히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나의 일부여야 하는 것이 벗어나 내팽개쳐질 때 소외되었다고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내 인생이 제멋대로 곁을 벗어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 현대 사상가들의 화두였습니다. 자유사상가들은 노예 상태를, 헤겔은 인간 정신의 소외를, 마르크스는 자기 노동으로부터 소외를, 비교적 현대 사상가들은 기술로부터 소외를 자신들의 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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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웠던 공부들이 어느새 거짓말처럼 향 연기마냥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이가 들어도, 그 시절 고민했던 내가 남아있게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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