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속 문장 11 – 시간의 옷이 달라지는 일
2023/09/02
인간에게 원칙적 시간성은 두 시간대 사이의 왕복이다. 잃은 것과 곧 올 것.
- 『심연들』, 파스칼 키냐르, 류재화 역, 문학과지성사, 2010. 파스칼 키냐르의 생각을 이렇게 변용한다. “시인, 작가에게 원칙적 시간성은 두 시간대 사이의 왕복이다. 상상되는 것과 상상되지 않는 것.”물론 시인과 작가에게만 ‘상상되는 것과 상상되지 않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에게 그것은 허용된다.
‘상상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오로지 상상되지 않는 것으로만 생을 채우게 된다면, 우리는 지루한 생을 빨리 끝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할지도 모른다. 상상이 없는 시간으로만 채워진 여정을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딱딱한 돌이 길게 이어져 발바닥에 고통만을 안기는 그 단하나의 느낌을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번 생의 자동차의 연료 주입구를 열고 ‘상상되는 것’을 한껏 채운 뒤에 시동을 걸고 나아가고, 질주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이에게서 4차원이라는, ...
@자키바(문정엽)
시간을 공간처럼 경험한다면, 이라는 사유는 매력적입니다. 공간화된 시간은 우리의 경험이 그렇듯이 각자가 만들어내는 누적에 의해 풍경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풀이 가득 자란 자리의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기억하는 일로 인해 상실과 경험의 잔존이 결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생각을 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간을 공간처럼 경험한다면 곧 잃을 것을 상실이 아니라 인생에 채운 경험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가능한 좋은 경험으로 인생을 채우기를 소망하는 것이죠. 그 시간에 누구와 무엇을 하며 무엇을 경험하는가? 이것이 시간의 의미를 정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간의 의미를, 삶의 교직으로 생각할 수 있겠구나. 덕분에 새로운 발견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뉴비
시간의 문제는 어떻게 해도 풀 수 없는 난제인 것 같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속도가 시간의 차이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물리적인 차이가 사실 인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최근 인간의 수명을 시간으로 계산한 영화들 <인 타임> 같은 것들이 있는데, 설득력 없게 느껴지기도 하다가 인간이 기계장치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지만, 역시나 그것은 설정에 불과한 것이고 평범한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수 세기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간의 질적 양적 팽창을 일상에서 극한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 문학과 예술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고맙습니다!!
@지미
아마도 상상력이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같은 상상을 앞에 앉혀 놓고 문장의 옷을 입혀보려는 욕심에서 좀 차이가 있을 텐데, 아무래도 작가들은 그런 욕심이 좀 많은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
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철학에게도 과학에게도 시간은 난제입니다. 그것이 문학에, 상상력에 와서도 그런가봅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느끼는 물리적이란 시간도 과학적으로는 늘어지기도 하니 결국 상상의 결과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글을 읽다보니 이어집니다.
평소 상상의. 시간 날실이 엉성한 저는 그래도 작가님들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때문에 겨우 옷을 기워입고 사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상상의 시간성과 원칙적 시간성을 어떻게 교직(交織)하여 옷감을 짜느냐에 따라 당신의 ‘시간의 옷’이 달라질 것이다.
음...나이 마흔 넘은 아지매는 상상이 부족한디
겁나게 어렵구만요^^
좋은 글 감사하옵니다^^
시간을 공간처럼 경험한다면 곧 잃을 것을 상실이 아니라 인생에 채운 경험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가능한 좋은 경험으로 인생을 채우기를 소망하는 것이죠. 그 시간에 누구와 무엇을 하며 무엇을 경험하는가? 이것이 시간의 의미를 정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간의 의미를, 삶의 교직으로 생각할 수 있겠구나. 덕분에 새로운 발견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키바(문정엽)
시간을 공간처럼 경험한다면, 이라는 사유는 매력적입니다. 공간화된 시간은 우리의 경험이 그렇듯이 각자가 만들어내는 누적에 의해 풍경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풀이 가득 자란 자리의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기억하는 일로 인해 상실과 경험의 잔존이 결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생각을 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뉴비
시간의 문제는 어떻게 해도 풀 수 없는 난제인 것 같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속도가 시간의 차이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물리적인 차이가 사실 인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최근 인간의 수명을 시간으로 계산한 영화들 <인 타임> 같은 것들이 있는데, 설득력 없게 느껴지기도 하다가 인간이 기계장치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지만, 역시나 그것은 설정에 불과한 것이고 평범한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수 세기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간의 질적 양적 팽창을 일상에서 극한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 문학과 예술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고맙습니다!!
@지미
아마도 상상력이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같은 상상을 앞에 앉혀 놓고 문장의 옷을 입혀보려는 욕심에서 좀 차이가 있을 텐데, 아무래도 작가들은 그런 욕심이 좀 많은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
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철학에게도 과학에게도 시간은 난제입니다. 그것이 문학에, 상상력에 와서도 그런가봅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느끼는 물리적이란 시간도 과학적으로는 늘어지기도 하니 결국 상상의 결과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글을 읽다보니 이어집니다.
평소 상상의. 시간 날실이 엉성한 저는 그래도 작가님들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때문에 겨우 옷을 기워입고 사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상상의 시간성과 원칙적 시간성을 어떻게 교직(交織)하여 옷감을 짜느냐에 따라 당신의 ‘시간의 옷’이 달라질 것이다.
음...나이 마흔 넘은 아지매는 상상이 부족한디
겁나게 어렵구만요^^
좋은 글 감사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