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로맨틱랜드 : 헤어질 결심(2022)

김터울
김터울 · 연구자, 활동가, 게이/퀴어.
2023/01/31
1.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정작 중요한 건 텅 비워놓은 채 매끈히 심신을 가꾸고 온갖 생활용품을 주렁주렁 갖고 다니는, 남 목숨이 상한 살인 사건을 조사할 때에 유독 다물어지지 않는 균열로서 제 존재를 확인하는 한 남자 형사, 그리고 애초에 자신이 만날 수 없을 물질적·감정적 계급을 지닌 그를 한번 보고선, 그에게서 ‘미결’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그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을 간파하고 그와 수 싸움을 벌이는 중국 여자와의 멜로 이야기다.

이제는 시대의 단어가 된 '역차별'을 대사에 그대로 넣은 채, 여자가 중국인 이주민에 갖가지 과거 경력으로 주위의 의심을 살 때 남자는 짐짓 PC한 염려로 그 의심들을 애써 나무란다. 그리고 나중 돼서 설득력 있는 심증으로 그 남자가 여자를 의심할 때, 그 때는 주위의 사람들이 거꾸로 그 남자의 의심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이미 남자는 여자에게 깊이 연루된 것이다. 높은 확률로 여자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런 상황을 세팅했을 것이다.

연애 전 밀당이 그렇듯이, 무언갈 모호한 채로 남겨두는 것은 주로 그러는 편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 속 두 주인공은, 모두 자기가 가진 모호함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적극적으로 써먹은 셈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둘은 또 한번 연루된 것이다. 다만 모호함과 모호함이 부딪칠 땐 주로 상황이 절박한 사람의 것이 좀더 힘이 세다. 흔히 말하는 비상한 수동성, 패시브 어그레시브라 불리는 어쩌구 말이다. 그리고 그건 보통 그 사람 개인의 타고난 품성이 아니라 그가 처한 조건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뭔가를 뚜렷이 보는 기능을 하는, 남자 형사가 이미 죽은 희생자의 그것에서조차 그 망막에 비친 범인의 모습이 무엇이었을지를 습관적으로 궁금해한 '눈'의 묘사가 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다. 신경의 과민을 견디지 못해 눈자위가 퀭해진 눈은 끊임없이 인공눈물을 필요로 하고, 젖은 안구의 동공 사...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사랑의 조건을 묻다』(숨쉬는책공장,2015), 『세상과 은둔 사이』(오월의봄,2021), 『불처벌』(휴머니스트,2022,공저).
59
팔로워 87
팔로잉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