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자 파라켈수스, '현대의학'의 불씨를 만들다

곽경훈
곽경훈 인증된 계정 · 작가 겸 의사
2023/02/26
관찰하고 질문하라
응급실 정문이 열리면 주황과 검정이 섞인 근무복을 입은 구급대원이 이동식 침대를 끌고 들어온다. 구급대원은 맡은 일에 특성 때문에 웬만해서는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서 응급실 의료진처럼 오랫동안 구급대원을 접한 사람은 그 미묘한 표정을 알아차릴 수 있다. 

"전신통증과 기력저하로 신고한 54세 남성입니다. 바이탈(vital sign ; 혈압, 체온, 맥박수, 호흡수 같은 지표를 의미한다)은 안정적이며 기저질환은 없다고 합니다. 집에 혼자 있었고 연락이 가능한 보호자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구급대원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하려 노력했으나 표정에서 '아주 작은 짜증'을 찾을 수 있었다. 반대로 이동식 침대에 누운 남성은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눈을 지그시 감아 아주 편안하게 보였다. 며칠 동안 씻지 않아 엉킨 머리카락, 거칠고 탄력없는 피부, 단순히 남루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세탁하지 않아 꼬질꼬질한 옷가지로 미루어 구급대원이 현장에서 응급실까지 남성을 이송하며 겪은 일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남성은 '공무집행방해' 같은 법적처벌을 받지 않은 수준에서 최대한 구급대원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다가 구급대원이 혹시라도 거기에 반응하면 민원으로 보답(?)했을 것이다. 

남성을 응급실 침대로 옮기고 시행한 이학적 검사에서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남성은 여전히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하는 도인'처럼 행동했다. 적극적으로 의료진을 방해하지 않았으나 구급대원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딱히 꼬투리를 잡지 못하는 정도에서 최대한 거슬리게 행동했다. 문진에도 마찬가지였다. 고혈압과 당뇨병 같은 질환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오랫동안 입원하거나 수술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도, 모두 아리송하게 대답했다. '그냥 요즘 힘이 없어서 119를 불렀다'가 남성이 적극적으로 말한 내용의 전부였다. 

"그럼 혹시 술은 마십니까?"

그 질문에도 남성은 고개를 양쪽으로 흔들며 '술을 끊었소'라고 대...
곽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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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메디컬에세이를 쓴 작가 겸 의사입니다. 쓸데없이 딴지걸고 독설을 퍼붓는 취미가 있습니다. <응급실의 소크라테스>,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반항하는 의사들>, <날마다 응급실>, <의사 노빈손과 위기일발 응급의료센터>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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