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나는 얼마나 한국인인가?'라는 물음 (2)
2024/04/20
델타 일식 여행 ② 토파즈 뮤지엄 1941년 말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후 미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별도의 수용소에 들어가야 했다. 미국 정부의 갑작스러운 명령이었다. 언론은 반일 정서를 부추겼고 모든 일본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와 린치도 늘어났다. 일본인들은 살던 집도, 하던 일도 놓고 쫓기듯 떠나야 했다. 많은 이들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낯선 곳으로 옮겨갔다. 그들 중 일부가, 대략 1만 1천 명이 ‘토파즈’라는 수용소에 갇혔다.
수용소는 문과 벽이 있어 막사라 할 뿐 열악했다. 창문과 지붕이 없는 곳이 있었고 있다 해도 사막 특유의 극심한 더위와 추위, 먼지 폭풍을 막아주지 못했다. 열려서 문이고 가려서 벽이었다. 막사는 온통 흙과 먼지투성이였다. 칸칸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이쪽 끝에서 말하는 소리가 저쪽 끝에서도 들렸다. 공용 화장실을 써야 했고 흐르는 물은 화장실과 공용 식당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화장실과 욕조는 수용 인원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불결한 환경과 영양 부족으로 병을 앓는 이들이 많았다. 허가를 받으면 외출을 할 수도, 쇼핑을 하러 나갈 수도, 근처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었지만 감시탑이나 철조망 가까이 가면 총에 맞았다. 총을 쏜 경비원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들은 미국에 대한 충성도 조사에도 임해야 했다. 두 가지 질문이 핵심이었다. 미국 군대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할 의향이 있는가? 일본 천황 대신 미국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겠는가? 두 질문에 No라고 답한 이른바 ‘No No Boys’들은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다른 캠프로 옮겨졌다. Yes라고 답한 이들은 입대해 전투에 참여했고 적잖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5년이 되어서야 미국 정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