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제목 : ‘돈의 무한한 욕구’라는 폭주마의 고삐를 우리는 다시 쥘 수 있을까
참고 사이트(글 링크) : https://alook.so/posts/zvtJXb
얼룩소 사이트의 수많은 글들 중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글이 있었습니다. 김원국 님의 ‘저는 남들이 저보다 못 살기를 원합니다.’였는데요, 누군가의 기쁨과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같이 기뻐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고 있는 현 실태와,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최대한의 불행을 바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김원국 님의 글에 공감해 주었습니다. 저는 글에 공감하면서도 약간 분석적이고, 매정하게 다가갔습니다. 한국 사회, 즉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한 ‘풍족함’과 ‘완전함’이라는 말은 자본주의에서 활성화되기 어려운 담론이라고 반응하면서 말이죠.
공론장을 벗어나 있는 동안에도, 유독 김원국 님의 글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원국 님의 글을 징검다리로, 조금 원론적인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해 보고자 글을 적어 봅니다. 최근 제가 인상깊게 본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로버트 스키델스키/에드워드 스키델스키 저)』에서 문제의식으로 다루는 ‘‘충분함(enoughness)’이라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대한 욕구와 사랑은 도덕의 영역에 편입될 수 있을까?’의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 논하기 전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욕구의 발현을 점화시킨 기제에 대한 소개와 함께 저의 생각과 경험을 짧게 공유하고, 필요와 욕구 개념의 분간이 어려워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논한 뒤 다시 이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금욕주의를 강조한 과거 지탄의 대상이 되어 온 욕구의 발현을 점화시킨 기제에 관하여 스키델스키 부자는 다음의 네 가지로 답합니다. 첫째, 자본주의의 경쟁적 논리는 회사들로 하여금 욕구를 조작하여 새 시장을 만들어 내도록 유도합니다. 소비자 그룹에 속하는 저는 전자기기를 살 때 ‘조작된 욕구’를 실감합니다. 약정 기간이 지나지 않았음...
모든 인간 행동의 정당성이 ‘화폐 획득’이라는 부수적인 목적에 종속된다는 말이 인상 깊게 다가옵니다.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에 들어오는 목적이 정말 학문에 대한 꿈이 있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좋은 대학 가서 좋은 곳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 거야!"처럼 화폐 획득이라는 목적에 종속되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관섭님의 말씀처럼 과거의 '좋은 삶'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돈에 대한 무한한 욕구와 사랑은 어쩌면 이젠 사회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풍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삶을 위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방식을 만들어가는 세상이, 주객전도가 된 이 세상이, 가치 판단이 필요하다기 보단 저는 그저 변해가는 사회에 발맞춰가는 방식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돈에 대한 무한한 욕구와 사랑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흔히 말하는 가재, 붕어, 개구리끼리만 모여살았더라면, 개천에서 난 용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돈에 대한 무한한 욕구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개천에서 용이 나고있고, 가재, 붕어, 개구리가 이를 다 봐버렸기에, 가재, 붕어, 개구리가 용이 되고자하는 욕구를 막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