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언제 영산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나?
2023/06/28
유사역사가들이 <전라도 천년사>에 어이없는 비난을 퍼붓고 있는데, 쟁점 중 하나는 백제가 언제 영산강 유역을 차지했는가라는 점이다.
유사역사가들의 이상한 주장 중 하나는 여기에 마한이 없다는 것이다. 마한은 <삼국사기>에 나오는대로 온조왕 때 멸망했으므로 그 뒤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한편으로는 마한은 북쪽에 있어서 남쪽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그들에게 마한은 전라도에 없었다는 것이다.
마한은 하나의 단일한 국가가 아니라 54~56개의 소국(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맹주국은 목지국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 온조왕 때 마한을 멸했다는 기록은 이 목지국을 멸망시켰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금관가야를 가리키고, 대가야가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로 활약한 것처럼 마한도 맹주국인 목지국이 멸망했다고 해서 다른 마한 소국들이 모두 멸망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유사역사가 식으로 말하자면 54개 소국이 다 멸망했다는 기록을 가져와봐라. (당연히 역사 해석은 이런 식의 몰빵으로는 할 수 없다.)
신생국가인 백제가 갑자기 산 넘고 물 건너 전라도 남쪽 끝까지 일거에 점령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다. 유사역사가들은 도무지 합리적인 추론이라는 걸 할 줄 모른다.
마한의 강역은 조선시대 학자 한백겸이 경기, 충청, 전라 일대로 비정한 바 있었다. 일제 식민사가들이 비정한 것도 아니다. (아무 의미도 없지만 유사역사가들은 식민사학자가 한 말이라면 펄펄 뛴다. 물론 자기네들이 이용해먹을 땐 모른 척한다.)
1980년대 들어와 이 지역의 고분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의 고분들은 백제의 고분 양식과는 다른 대형 옹관이었는데, 그 규모로 보아 4세기 후반 이후에도 독자적인 정치체가 있음이 분명해졌다. 이 발굴 성과는 역사 해석에 영향을 주었다.
@누군가의친구 지당한 말씀입니다.
사실 사료라는게 진실과 거짓 둘다 담겨있는데, 삼국사기가 편찬될 무렵에는 백제가 멸망한후 한참 후이니 이과정에서 살이 빠지고 덧붇여진 내용이 남았을 것이고 이게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막상 사료를 보니 그런 기록밖에는 없던 거겠죠.
또한 삼국의 멸망 외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 자신까지도 이전 사료들을 상당수 잃었음을 알수 있는데 이전 실록이 소실되어 7대 실록을 편찬했고 이후 조선왕조가 고려왕조실록을 기반으로 고려사를 편찬했음에도 이 시기 기록은 매우 빈약합니다.(조선왕조가 멸망시킨 왕조의 기록을 그리 편찬할리 있겠냐 싶지만 고려사는 막대한 양을 자랑합니다. 오죽이면 이를 좀 요약한 고려사절요까지 편찬했겠습니다만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에 없는 내용도 있어서 고려사 연구에 둘다 필수입니다.)
어째건 김부식과 그외 편찬자들이 살아있을 고려 인종시기에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고려에 남아있는 기존 삼국의 기록은 꽤나 적은 데다가 세월을 거치면서 살이 빠지고 덧붙여진 과정을 거쳐서 남았을 것이고 그래서 부단히 노력했다지만 양이 적을수 밖에 없죠.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과 사료가 충돌할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고고학적 발굴로 내용이 사실로 입증되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현존 사료는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항상 비판적으로 보고 추리해야 하죠. 당장 미륵사는 다들 선화공주가 건의하여 지은 걸로 알았지만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금제사리봉영기는 이를 부정하고 있지요. 그외 백제도 고구려의 태학이나 신라의 국학같은 교육기관 있을거라고는 추정하지만 정확한 명칭을 알지 못하다가 중국에서 발굴된 백제 유민의 묘지명에서 '태학'이라는 명칭을 확인할수 있었죠.
즉 고고학적 발굴은 사료가 여러 이유(기록 소실, 편찬자의 위치, 사료의 목적)로 말하지 않는 진실을 말해주기 때문에 사료 맹신은 피해야 할 행동입니다.
사실 사료라는게 진실과 거짓 둘다 담겨있는데, 삼국사기가 편찬될 무렵에는 백제가 멸망한후 한참 후이니 이과정에서 살이 빠지고 덧붇여진 내용이 남았을 것이고 이게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막상 사료를 보니 그런 기록밖에는 없던 거겠죠.
또한 삼국의 멸망 외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 자신까지도 이전 사료들을 상당수 잃었음을 알수 있는데 이전 실록이 소실되어 7대 실록을 편찬했고 이후 조선왕조가 고려왕조실록을 기반으로 고려사를 편찬했음에도 이 시기 기록은 매우 빈약합니다.(조선왕조가 멸망시킨 왕조의 기록을 그리 편찬할리 있겠냐 싶지만 고려사는 막대한 양을 자랑합니다. 오죽이면 이를 좀 요약한 고려사절요까지 편찬했겠습니다만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에 없는 내용도 있어서 고려사 연구에 둘다 필수입니다.)
어째건 김부식과 그외 편찬자들이 살아있을 고려 인종시기에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고려에 남아있는 기존 삼국의 기록은 꽤나 적은 데다가 세월을 거치면서 살이 빠지고 덧붙여진 과정을 거쳐서 남았을 것이고 그래서 부단히 노력했다지만 양이 적을수 밖에 없죠.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과 사료가 충돌할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고고학적 발굴로 내용이 사실로 입증되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현존 사료는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항상 비판적으로 보고 추리해야 하죠. 당장 미륵사는 다들 선화공주가 건의하여 지은 걸로 알았지만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금제사리봉영기는 이를 부정하고 있지요. 그외 백제도 고구려의 태학이나 신라의 국학같은 교육기관 있을거라고는 추정하지만 정확한 명칭을 알지 못하다가 중국에서 발굴된 백제 유민의 묘지명에서 '태학'이라는 명칭을 확인할수 있었죠.
즉 고고학적 발굴은 사료가 여러 이유(기록 소실, 편찬자의 위치, 사료의 목적)로 말하지 않는 진실을 말해주기 때문에 사료 맹신은 피해야 할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