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후에 남은 고통의 흔적들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4/02/21


연말에서 연초에 걸쳐 친구들과 여수에 다녀왔다. 함께 놀러 다니는 모임에서 한 명이 연말에 여행이나 갔다오려는데 같이 갈 사람 없나요, 하고 물어 충동적으로 결성된 여행 모임이었다. 긍정적인 소감부터 정리하자면 대체로 즐거운 여행이었다. 볼거리는 적당히 많았다. 특히 향일암은 세계의 여느 명소 못지 않은 수준으로 아름다운 사찰이었고, 과학관도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가격이 저렴한 것도 장점이지만 윤리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이 참 좋았다. 평소에 음식으로만 접하던 생물들을 직접 수족관에서 보니 퍽 아름다워 놀라기도 했다. 출구를 나서자마자 탁트인 해변을 볼 수 있었다는 점도 멋졌다. 그밖에도 여기저기 찾아보면 볼 만한 곳이 많았다. 여수는 딱히 볼 게 없다는 소문도, 절대 그렇지 않고 볼 게 넘쳐난다는 반론도 사실은 아니고, 잘 찾아보고 다니면 볼 게 많고 대충 다니면 그저 그랬다는 평을 할 만해 보였다. 많은 관광지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반면에 먹을 것은 거의 다 좋았다. 당연하게도 해산물이 특히 좋았고 반찬까지 모두 푸짐했는데, 그중에서 내 입맛에는 숙회가 특히 맛있었다. 그러나 일행 모두의 종합적인 평을 보자면 여수에서 먹은 최고의 음식은 다름아닌 리조또였다. 참 뜬금없게도, 경치 좋은 카페에서 별 기대 없이 시킨 리조또가 평생 먹어본 그 어떤 이탈리아 음식보다 더 맛있었던 것이다. 영혼에 스며드는 닭고기 스프 같은 맛이었다. 그때 배가 고프기도 했고 기대감도 낮았다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여수 최고의 식사는 리조또였다. 내게 준 감동의 크기를 고려하면 여수 밤바다처럼 리조또에 대한 노래도 하나쯤 나오면 좋겠다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수의 아름다움이나 여행의 즐거움이 아니라 이번 여행을 통해 겪은 고통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할 작정이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시해두고 싶은 점은, 나의 고통과 슬픔이 여수 자체나 여수의 점포들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 나와 일행의 불운과 개인적 성향에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실패는...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135
팔로워 23
팔로잉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