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속 문장 14 – 밤에 찾아온 또 다른 세계

천세진
천세진 인증된 계정 · 문화비평가, 시인
2023/09/16
    “나는 한 해 여름을 세잔과 드가의 몇 폭의 그림과 살았습니다. 그것들은 물론 추상화였지만, 그런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비유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의 도전으로 돋보였습니다. 나는 낮에 한 번도 색깔을 보지 못했지만 색깔과 구성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음영의 농도에서 그것이 세잔의 달빛인지 드가의 밤인지를 기억해내고 판별해낼 수 있었으니까요. 나중엔 도서관에서 예술서적을 몇 권 찾아내어 창틀 밑에 웅크리고 앉아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것은 유령의 세계와도 같았지만 어쨌든 어엿한 하나의 세계였습니다.”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그늘진 낙원』 중에서   
세잔 ㅡ<생트 빅투아르산>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누구도 세잔과 드가의 작품들을 희미한 별빛이 새어 들어오는 어둠 속에서 본 뒤의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캔버스 위에 만들어진 아주 낮은 굴곡의 세계를, 그 굴곡에 의해 만들어진 음영의 세계를 색깔들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누가 떠올리려 했겠는가? 

    그건 마치 칠흑의 어둠 속에서 눈에 새겨두었던 카시오페이아와 오리온과 전갈을 환한 대낮의 하늘을 보며 떠올린 글을 누구도 발표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지 모른다. 우리의 신념은 어둠과 환함이 만들어가는 변주에 익숙하도록 태어난 눈에게 어느 한쪽을 무시하도록 편협을 강요했던 것이고. 어느 한 쪽의 세계에 대해 청맹과...
천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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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순간의 젤리>(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풍경도둑>(2020 아르코 문학나눔도서 선정), 장편소설<이야기꾼 미로>, 문화비평서<어제를 표절했다-스타일 탄생의 비밀>, 광주가톨릭평화방송 <천세진 시인의 인문학 산책>, 일간지 칼럼 필진(2006∼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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