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3
영화가 됐든 문학작품이 됐든 끝은 중요하다. 관객이나 독자는 종종 그 장면을 접하고 얻은 인상으로 작품이 품은 미학에 대한 거의 전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어제 독서회 회원들과 함께 츠쯔졘(1964, 중국)의 『뭇 산들의 꼭대기』의 마지막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화 『닥터 지바고』(1978)와 『잉글리쉬 페이션트』(1991)의 속 어느 장면을 이야기 했다. 얼룩커 ‘악담’님께서 『잉글리쉬 페이션트』에 대한 이야기를 쓰시기도 해서 ‘끝’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와 문학>의 두 번째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츠쯔졘(1964, 중국)의 『뭇 산들의 꼭대기』(은행나무, 2017)가 끝나가는 부분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눈의 도래는 비와 같지 않았다. 비는 간이 작아 인간 세상에 올 때 항상 우레와 번개를 통해 그 길을 열지만, 눈은 호기가 하늘을 찌르고 세상 무서울 게 없어 언제나 혼자 와서는 하룻밤 사이에 대지의 색깔을 바꾸어놓았다. ...
@최서우
어떻게 해도 영화나 드라마에 담기는 풍경은 재단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며 얻어온 풍경도 그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인간의 눈은 풍경의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너무 작고 좁거든요. 새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너희는 참 넓고 멀리 보겠구나...
이미 탄생한 것을 빌려 만들어지는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책...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고는 합니다. 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서요. ^^ 고맙습니다!
때로는 풍경이 서사를 삼켜버리기도 하여 저는 풍경이 억지로 가둔 액자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싫어합니다. 문체가 아름다울땐 그 문장의 의미를 긴여운으로 남겨주길 하는 바람이 있기도합니다.
@악담
영화를 보다가 인간을 참 무력하게 만들고, 심하게는 무화시켜 버리는 풍경을 만나면--그 풍경이 연출이라하더라도-- 그 풍경이 들어와 오래 머물며 나갈 줄을 모릅니다. ^^
@뉴비
어느 때는 풍경이 우리를 스쳐가기도 하고, 어느 때는 눈 앞을 가로막고 서서 보기를 강요하기도 하지요. 사회적 풍경들은 언제나 '강요'말고는 다른 화법을 갖고 있지 않아서 몹시 버거겁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봐주기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 풍경들만을 흠모합니다. 제가 그 안에 들어서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쓰지 않는 풍경들이지요.
장대한 풍경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풍모를 지닌 것 같고요. ^^ 고맙습니다!
천세진 님 글을 읽으니 마치 방금 닥터지바고와 페이션트를 본듯 눈에 선합니다.
무덥던 여름과 새벽녘 선선해 지는 날들로 저는 알마시와 지바고의 중간쯤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새로운 곳에 이사와 호기로운 눈이 바꿔놓을 풍경을 기대하며 저녁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장대한 풍경 앞에 자신을 놓아 보고 싶어 생경한 풍경을 찾아 멀리도 떠나보았지만 결국 뒷산 그림자에 놀라고 마는 밤도 많습니다.
소설과 영화의 장대한 끝에 심장이 내려앉다가도 삶의 소박한 풍경에서 사막의 갈색 바다와 러시아의 흰 바다를 보곤합니다.
무덥던 여름과 새벽녘 선선해 지는 날들로 저는 알마시와 지바고의 중간쯤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새로운 곳에 이사와 호기로운 눈이 바꿔놓을 풍경을 기대하며 저녁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장대한 풍경 앞에 자신을 놓아 보고 싶어 생경한 풍경을 찾아 멀리도 떠나보았지만 결국 뒷산 그림자에 놀라고 마는 밤도 많습니다.
소설과 영화의 장대한 끝에 심장이 내려앉다가도 삶의 소박한 풍경에서 사막의 갈색 바다와 러시아의 흰 바다를 보곤합니다.
때로는 풍경이 서사를 삼켜버리기도 하여 저는 풍경이 억지로 가둔 액자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싫어합니다. 문체가 아름다울땐 그 문장의 의미를 긴여운으로 남겨주길 하는 바람이 있기도합니다.
@악담
영화를 보다가 인간을 참 무력하게 만들고, 심하게는 무화시켜 버리는 풍경을 만나면--그 풍경이 연출이라하더라도-- 그 풍경이 들어와 오래 머물며 나갈 줄을 모릅니다. ^^
천세진 님 글을 읽으니 마치 방금 닥터지바고와 페이션트를 본듯 눈에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