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쉬페이션트 ㅣ 깊이와 고통이 서로 중첩될 때

악담
악담 · 악담은 덕담이다.
2023/08/31
잉글리쉬페이션트, 화면 캡쳐
안소니 밍겔라 감독이 연출한 << 잉글리쉬 페이션트, 1996 >> 에서 아내가 있는 남자와 남편이 있는 여자는 서로 사랑에 빠진다. 남자가 묻는다. "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소 ? " 여자는 그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지체없이 말한다. " 지금이요. " 남자는 다시 묻는다. " 그렇다면 살면서 가장 불행했던 때는 언제였소 ? " 여자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듯 담담하게 답한다. " 지금이요...... " 
이 대화 장면은 2시간 40분이 넘는 이 영화의 핵심을 보여준다.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둡고 전쟁이 끝나기 전이 가장 잔인한(전쟁 범죄가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불행하기 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 행복하기 전이 가장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불륜이라는 속성의 본질을 간파한 듯하다. 이렇듯 상반된 두 개의 항이 대립하면서도 서로 중첩이 될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네 명의 등장인물과도 겹친다. 얼굴이 불에 타 형태를 알 수 없는 영국인 환자는 헝가리 귀족 가문의 남작으로 독일 스파이이고, 카라바지오는 캐나다 사람이면서 영국군 스파이이다. 그리고 폭탄 제거반 군인인 킵은 인도인이지만 영국군이다.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모두 자신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이탈리아의 어느 무너진 건물에서 조우한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항이 중첩될 때 발생하는 모호성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이 모호성이 깊이와 고통을 낳는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장 그르니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 그의 글을 왜 좋아하는 척하는 것일까. 깊이도 고통도 없는 글들을. " 당시에 장 그르니에의 글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김현에 대하여 살짝 반감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보니 그의 한탄은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문장은 단순히 읽기에 좋은 장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극장 안에서 웃고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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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호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악담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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