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엽편 소설)

조제
조제 · 예술가
2023/04/01
아, 이제 시원하다.

이것 봐, 마누라. 나 지금 술도 안 먹었는데 취한 것처럼 기분이 좋네. 하늘을 날아갈 것 같구만. 내가 이런 말하면 자네는 또 헛소리한다고 타박하겠지만, 진짜 그런 걸 어쩌겠나?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일세. 자네랑 내가 이 서울 변두리 구석에 처음 내 이름으로 된 집을 샀던 그날만큼 기분이 좋아.

그때 대문밖에 척하니 문패를 걸고 올려다 본 이 집은, 세상 어떤 궁궐보다도 멋져 보였지. 아무렴, 왜 안 그랬겠나? 내가 스물 여섯, 자네가 스물 셋일 때 부산 국제시장 옆 단칸방에서 시작해 십여년 만에 가지게 된 내 집인데. 비록 갚아야 할 대출금이 많았지만 그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

근데 언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점점 더 많이 마시게 된 술이 문제였나? 하지만 난 술이 없으면 견딜 수가 없었어. 자네도 알지? 내가 사람들한테 아쉬운 소리 잘 못하고, 마음 약한 거. 처음엔 그런 점도 좋다고 했잖아? 물론 나중엔 지긋지긋해 했지만.

아침에 출근해 하루종일 외판일을 하다보면 별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되었지. 술을 같이 거나하게 마셔야만 성사되는 계약들도 많았어. 잘 치지도 못하고 재미도 없는 골프도 배워야했지. 난 그런 게 싫었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지.

게다가 우리 회사 물건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매출은 점점 줄어들었지. 지점장은 매일매일 닦달을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녀도 한건도 못 올리는 날도 허다했어.

그런 날 집에 혼자 터덜터덜 들어올 땐 집에 들어가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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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친족성폭력 생존자입니다. 오랜 노력 끝에 평온을 찾고 그 여정 중 알게 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로 희망과 치유에 대해서. '엄마아빠재판소', '살아있으니까 귀여워'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 '은둔형 외톨이의 방구석 표류일기'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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