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파도를 넘으려는 당신에게 - 인듀어런스(Endurance)호

이창
이창 · 쓰고 싶은 걸 씁니다.
2023/08/04

[올해는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시인이자 수필가, 소설가였던 멋진 글의 잔치였습니다. 소중한 글을 보내주신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아쉬움보다는 열정적으로 임한 내 인생의 한순간으로 기억해 주세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더 단단해진 문장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지랄하네. 종이엔 화사한 꽃문양이 불규칙한 거리를 두고 피어있다. 구겨진 한쪽 가장자리가 이곳에 오기까지 험난한 전송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했지만 우편물은 곧바로 바닥에 내팽개 쳐지는 것으로 그 쓰임새를 다 했다. 턴테이블을 켜기 위해 리모컨을 찾는다. 왜인지 늘 두던 자리에 보이지 않아 있을 법한 곳의 물건을 공연히 들었다 놓길 반복했다. 그리고 바닥의 봉투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열 살짜리 아이 달랠 때나 할 법한 가식적인 위로도 그렇지만 띄엄띄엄한 푸른 꽃무늬가 더 괘씸했다. 이거야말로 채플린도 혀를 내두를 교묘한 엿 먹이기 수법 아닌가. 이런 센스를 가진 출판사라면 최승자의 산문을 그대로 긁어와도 지나치게 염세적이란 이유로 탈락시킬 게 뻔했다. 빌어먹을 심미 중독자들.

리모컨은 포기하고 직접 전원 버튼을 눌렀다. —.—.—-. 아무래도 라디오 주파수가 어긋난 모양이다. 채널 스위치를 몇 번 좌우로 돌려본다. 조금씩 진행자의 말소리가 뚜렷해졌다. 책상은 대체로 정돈되어 보이지만 정작 제대로 된 청소는 기억에서 까마득했다. 그도 그럴 게 거칠거칠한 질감의 남색 탁자보에 한참 전부터 묻어있던 커피 자국이 오늘따라 더 크게 느껴졌다.


​“—.—.-ㅇ…늘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했으며 대부분의 종목에 파란 불이 켜졌습니다.”


​나는 엉덩이 쿠션이 움푹 들어간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뉴스나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노트북의 검은 화면에 얼굴이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다. 잠금을 풀자 하얀 화면 그 제일 밑문장 끝에 까만 세로줄 커서가 깜빡거린다. 빼곡하게 채워져있는 글을 찬찬히 드래그해본다. 도배하듯 파란 칠로 뒤덮이는 글자들. 조금의 망설임 그리고 백스페이스 딸깍. 아까운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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