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셰린의 벤시 메모
2024/03/25
이니셰린의 벤시
떠나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어려울 때도 있다. 사람들은 늘 쉬운 길을 택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관계를 끊기보다 죽이는 길을 택했다. 음악이나, 예술이나, 혁명이나, 신이나, 민족을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무서운 건 이것들이 아니다. 무서운 건 관계다. 어떤 관계는 마약과도 같아서 죽거나 죽이지 않고는 끊을 수가 없다. 그런 관계를 끊는 것에 비하면 손가락을 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관계를 끊기 위해 상처를 입히는 것은 충격요법으로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상처 입히기의 곤란한 점은,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상처를 견딜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가장 숙련된 고문기술자들조차 때로 사람을 죽이는 판에 훈련되지 않은 일반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충격요법은 죽거나 죽이지 않고 관계를 끊고도 살아가기 위해 자주 애용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종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한다.
폐쇄된 조직에서 괴롭힘을 당하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왜 죽어, 그냥 그 직장 그만두지, 라고 생각한다. 아예 좁은 섬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확실히 모든 문제가 훨씬 견디기 쉬워질 지도 모른다. 여동생은 그런 길을 택했다. 그러나 여동생이 그런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적 지식과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할 수 있다는 조건 덕분이었다. 반면 뚱보는 섬을 떠나지 않고 차라리 자기 손가락을 잘라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