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리로 뻗은 감정의 바깥 : 서위(徐渭)가 그린 검은 목란

김터울
김터울 · 연구자, 활동가, 게이/퀴어.
2023/07/26
7년 전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갔을 때 사온 손수건이다. 그간 땀 닦는 용도로 막 굴리다가 문득 그림의 내력이 궁금해져 찾아봤더니, 손수건 속 수묵화는 고궁박물원에 소장돼있는 서위(徐渭, 1521~1593)의 <畵牧丹>란 작품이다. 그는 당대 문인화의 기풍에서 벗어나 술먹고는 대충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짐짓 현대적으로 보이는 번지기 효과와 추상적인 화풍이 그에 힘입은 것이다. 본래 화려한 색채를 덧입히는 모란을 구태여 흑백으로 그린 것이 이 그림의 특징이다.

그는 30~40대 시절 사회 참여에 관심이 많았다가, 38세 때 모시던 상관이 4년 후 처형되면서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귓구멍에 못을 집어넣었으며, 그 광증을 앓던 중 46세 때 후처를 살해해 7년간 옥살이를 했다. 정신질환의 후유증으로 음식을 잘 먹지 못해 꼬챙이처럼 말랐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70세 때는 팔이 부러져 불구가 되었다. 그는 평생 자신의 능력에 비해 뜻을 펴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자괴감에 시달렸고, 본디 화려한 모란을 수묵으로 거듭 그린 것은 그런 심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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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을 묻다』(숨쉬는책공장,2015), 『세상과 은둔 사이』(오월의봄,2021), 『불처벌』(휴머니스트,2022,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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