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푸른 나무

이종호 · 영어 번역가
2023/11/23
수필 - 캄보디아의 푸른 나무 

창덕궁 앞에 도착했을 때 동현과의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20분이 남아 있었다. 캄보디아에 거주하며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 동현이가 모처럼 한국에 나왔다기에, 함께 창덕궁을 둘러본 후 점심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 아침부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이었다. 우산을 쓰고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햇볕에 검게 그을린 동현의 얼굴이 어느 새 가까이 다가와 내 이름을 불렀다. 거의 1년만이었다. 우리는 웃으며 반갑게 악수를 했다. 
   
동현과는 30년지기 친구다. 그를 처음 만나던 날도 비가 내렸다. 대학 입학 과정의 하나인 신체검사가 있던 날이었다. 아침부터 바람이 제법 불었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었다. 나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기 위해 대학 교정을 나섰다. 
나는 선천성 약시로 2급 시각장애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내 자리는 항상 선생님의 교탁 바로 앞이었지만, 맨 앞자리에 앉아도 칠판 글씨는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녹색 바다에 뿌연 안개처럼 보였다. 체육시간이면 나는 늘 운동장 나무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바람에 나뭇잎이 굴러가는 모습, 담장 너머로 어렴풋한 마을 풍경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자란 고향은 두메산골이어서 학원 하나 없었기에, 학교 공부는 대부분 참고서에 의지해 스스로 공부했다. 거의 독학으로 어렵게 대학에 합격했지만, 마지막 관문인 신체검사가 또 걱정이었다. 혹시 나쁜 시력을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신체검사를 받는 병원으로 이동하려면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 번호를 구별하여 볼 수 없는 나는 머뭇거리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버스 온다. 같이 타자.” 동현과의 첫 만남이었다. 
동현은 선량하고 다정한 친구였다. 일부러 나와 같은 과목을 수강하며 나쁜 시력 때문에 강의실을 잘 찾지 못하는 나를 도와주었고, 게시판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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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 영어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석사. 안산1대학교와 대림대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다수 매체와 기업체에서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잘난 척하고 싶을 때 꼭 알아야 할 쓸데 있는 신비한 잡학 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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