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건 아니다 - 4. 고매한(?) 철학 

살구꽃
살구꽃 · 장면의 말들에 귀를 모아봅니다.
2023/12/24

그해 겨울, 언니는 맞춤 부츠를 신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학원이 끝나면 집에 와서도 뭔가를 방바닥에 늘어놓고 신문지나 도화지를 오리기도 했다. 단칸방에 다락하나가 딸린 우리 집은 한동안 평온했다. 돼지 키우는 걸 정리하고 아버지는 목수 일을 다녔다. 엄마도 동네에서 좀 떨어진 ‘사모님’이라는 집에 가서 시간제 파출부일을 했다. 봄이 되면 난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돈이 들어가는 건 남동생 학비뿐일 텐데 우리는 여전히 셋방을 살았다. 언니 학원비는 처음부터 영식이 아저씨가 대주고 있었다. 
   
“아버지, 유학과는 무슨 공부를 하는 거예요?”
   
비가 와서 아버지가 공치는 날이다. 집에서 느긋하게 신문을 보던 아버지 등 뒤로 물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힐끔 보던 아버지 눈이 다시 신문으로 갔다. 경제학과 국문과 수학과 이런 건 알겠는데 영식이 아저씨가 대학에서 공부하는 유학과라는 건 첨 들었다. 
   
“그거이 유학과는 철학과 같은 거이야. 거 고매한 정신을 공부하는 거디...”
   
철학, 고매, 정신... 아버지로부터 이때 들었던 말은 열 몇 살의 내게 다른 차원으로 다가왔다. 철학이 뭔지 사전에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인생 지식에 관한 근본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 등으로 나와 있었다.  막연하게나마 나는 영식이 아저씨라면 철학과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해가 바뀌었다. 설 명절을 앞두고 언니 생일이 있었다. 언니와 내가 생일이 같으니 내 생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가 다시 집을 나갔다. 양재학원을 오가며 들고 다녔던 가방이나 도화지, 자, 가위 같은 그 모든 물건들이 주인을 잃었다. 영식이아저씨를 본 지도 꽤 된 것 같았다. 둘이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짤막한 편지에는 처음 가출 때 쓴 내용이 반복됐다. 엄마, 아버지 제가 성공할 때까지 집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 걱정 마시고 몸 건강히 안녕히 계세요. 불초여식 00이가. 언니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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