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소설] 앞장과 뒷장 사이의 우주 (1)

문지혁
문지혁 인증된 계정 · 소설가/번역가
2024/03/22
앞장과 뒷장 사이의 우주


문지혁



무엇이든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로마서 15:4



  책장 없는 서재

  문을 열자 서재에는 책 기둥이 수북이 솟아올라 있었다. 
  네 책도 있을 거야. 필요하면 가져가라.
  은퇴와 이사를 동시에 앞두고 있는 아버지는 책장을 먼저 처분했다고 말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에 본가에 들렀던 나는 예상치 못한 숙제를 받아든 기분이었다. 집을 잃어버린 책들이 길가에 나앉은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것이 영 보기 불편했다. 눈으로만 잠깐 훑어보아도 낯익은 책들이 여럿이었다. 그중 맨 위에 있는 책을 꺼내 살펴보았다. 노턴 앤솔로지 오브 잉글리시 리터러처 볼륨 원. 2,974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벽돌 같은 책은 학부 시절 들고 다니던 교재였다. 이런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닐 텐데. 게다가 책 아래에는 오래전 헤어진 연인의 이름이 적혀 있어 난감했다. 나는 화제를 돌리고 싶어졌다. 
  이게 다 몇 권이에요? 
  삼천 권쯤 되려나. 
  뭘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책을.
  그래도 한참 줄인 거야. 칠천 권에서.
  나는 책을 살피기도 전에 벌써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칠천 권이요?
  아버지는 몸을 돌려 서재를 빠져나가며 말했다.
  가져갈 책을 골라 봐.
 

  아버지는 목사였다. 1983년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는 40년 가까이 여러 교회를 옮겨 다니며 목회를 했다. 그의 책은 신학책이 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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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고잉 홈』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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